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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원룸형 인간 - 심장 위를 걷다
원룸형 인간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전혜린의 수필집에서였습니다.

흙이 아니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생활해

감성이 메말라버린 현대의 아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기억합니다.

전혜린식대로 표현하자면

저는 ‘아파트 킨트’입니다.

태어나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파트 이외의 주거형태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20년간을 아파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이 아파트 생활에 최적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12년간의 원룸 생활을 접고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건물 현관 입구에 붙은 ‘과외 구함’ 전단지,

낡은 엘리베이터와 층계,

나이지긋한 아저씨가 꾸벅 꾸벅 졸고 계시는 경비실,

슈퍼마켓과 문구점, 각종 음식점들이 한꺼번에 자리한 아파트 상가

등등에서

익숙한 고향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_-;

아,

저는 너무나도 원룸 생활에 최적화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들 인사를 하는지.

"새로 이사왔어요? 원래 그 집에 살던 애기 엄마는 어디로 갔나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고,

어쩌다가 계단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없이 스쳐지나가던 원룸의 익명성에 익숙해진 제게

이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관심은

낯설면서도 당황스럽습니다.

이사 다음날 아침

베란다 물청소를 하는데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당시엔 초인종이 고장나 있었습니다.)

친히 11층까지 올라오신 경비실 아저씨가

"새로 오셨나보죠? 물청소를 하면 아래층으로 물이 떨어지잖아요. 물청소는 비 오는 날에만 하세요"라고

주의를 주고가셨습니다.

거주자들이 대개들 혼자 살아서 낮에 집을 비우곤 했던

예전 집에서는 제가 물청소를 하든 안 하든

아무도 상관을 하지 않았는데.

예전의 집에서는 재활용 쓰레기를 매일 버려도 됐었는데

이 곳은 수요일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로 정해져있더군요.

갓 이사를 와서 버릴 것이 많았던 저는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에 종이박스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다음 수요일까지 못 기다리겠길래…

종이 박스 몇 개를 들고 몰래 가져다놓으러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번에도 엘리베이터가 화근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할머니 한 분이

저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그거 오늘 버리면 안 돼요. 수요일에 버려야 해."

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 이사와서 잘 몰랐어요. 그럼 도로 갖다놓아야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할머니께서

"마침 경비실 아저씨가 없으니 몰래 갖다놔요. 빨리" 하시길래

상자 더미 위에 가져온 상자를 쌓아놓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다른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생전 처음 보는 제게

"아이고.. 젊어서 좋겠다… 나도 그렇게 젊었으면…" 하시더군요.

저는 불법 쓰레기 투기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순진한 영혼인 양

해맑게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참 얌전하게도 생겼네."

……..앞으로 저는 이미지 관리를 해야하는 건가요? -_-;;

성인이 된 이후의 12년간의 원룸 생활이

저를 얼마나 바꿔놓았는지를 매일매일 느끼는 요즘입니다.

‘아스팔트 킨트’와 ‘원룸형 인간’ 중

어느쪽이 더 피폐한 정서를 지닌 삭막한 인간일까요?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쓴 소설을 보면

하나같이 ‘집’이 아닌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방의 시대’에 동참했던 一人으로서

‘방’의 인간들은 ‘집’의 인간들과 어떻게 다른 심성과 생각을 지니고 있을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방 하나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시스템으로 살다가,

방 두개짜리로 옮겼더니

잠들기 전에 각 방과 부엌의 전등을 모두 꺼야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다른 방으로 가야한다는 사실도 참 낯섭니다.

움직일 때마다 동선이 꼬여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방에 문을 닫아놓고 틀어박혀 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저 자신을 보면서

몸에 밴 습관이란 게 참 무섭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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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입니다.

산비탈이라들고 나기는 불편하지만

풍광 하나만은

서울시내 그 어디도 부럽지 않답니다. ^^*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sophiaram로 이사합니다.

11 Comments

  1. wonhee

    2010년 10월 29일 at 7:05 오후

    이사를 잘 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아스팔트 킨트’라는 제목이 낯이 익었는데
    중3 때 전혜린의 수필집에서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 세대 중 하나이겠지요?
    한편으론 그렇게 사는게 편하면서도
    사람들 과 정신적/정서적 교감을 원하는 마음도 있지요.

    아람님 새집 베란다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서울에서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살 수 있다는건 축복이겠지요? ㅎ   

  2. 곽아람

    2010년 10월 29일 at 9:38 오후

    원희님> 네, 이사를 잘 했답니다. ‘아스팔트 킨트’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수필이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원룸의 익명성과 아파트의 다정함 사이 그 어느 중간엔가 있는 것 같아요. 네, 저도 이 풍경만으로 축복이라고 믿고 살려고요. 근데 비탈을 오르내리는 건.. 참.. 힘들군요.    

  3. 김남교

    2010년 10월 30일 at 5:21 오후

    아파트의 경우 가임기 여성이 혼자 또는 몇이 끼리 살면 아줌마 할머니 들의 안테나가 가동합니다 심지어 유리그라스를 벽에 대고 옆집 소리까지 듣곤하는 걸요 자녀교욱을 이유로 심싱풀이 땅콩이 되는 겝니다 서울에서 단풍까지 가시 고도까지 가셨으니 큰 눈 오면 출퇴근에….방송에 쏠리는 통에 종이신문 인기 급락과 불규측적인 직업특성에 가끔 음주까지 가능할수 있을테니 앞으로 인생계획에도 영향? 우리나라가 남자 직장생활중 학력은 안 쳐주고 여성 고학력(특히 일류)과 고수준 직업(사실상 정년도 빠른가요)도 예단면제 사유가 안되니 참 손해가 많지요 함께 걱정이 됩니다^^^^건승을 빕니다 그리고 국내 미술품등 고전인용도 부탁합니다    

  4. 스프링복

    2010년 10월 30일 at 5:23 오후

    앞으로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 치는 새 이웃분들에게 "조선일보 구독하세요?" 물으며 역공을 가하심이… 아무튼 금새 괜찮아질 겁니다. 그나저나 집들이 선물이라도 보내 드려야 하는데… 바다 건너라 안타깝네요..    

  5. 김미영

    2010년 11월 2일 at 9:11 오후

    아니 어케 된 게
    제가 여고시절에 읽었던 책과 작가를 아람님이 알고 계시다니…
    우린 그럼 몇살 차이 안나는거 맞죠?ㅋㅋ

    드뎌 이사를 하셨군요.
    점점 싱글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시는 건 아닌지 …
    제 후배가 원룸생활 청산하고 투룸가더니 결혼을 반쯤 포기하고
    작년에 아파트 들어가더니 아예 결혼을 포기하더라구요.
    ㅋㅋ

    행여 못박을 일이나 수리껀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저희 부부가 달려갈게요.
    ^&^

    남편은 최근 모 잡지사로 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답니다.
    고사하더니 못이기는 척 하면서 해주더군요.
    최근엔 아들의 피아노방을 개조하여 본인의 서재로 꾸미고는
    명실상부한 작가(?)로 ㅋㅋㅋ   

  6. 곽아람

    2010년 11월 4일 at 10:16 오후

    바쁘다는 핑계로 댓글이 늦었습니다. ㅎ
    잘 지내고 있어요.
    다들 감사합니다!!!   

  7. 안녕

    2010년 11월 5일 at 11:35 오전

    좋은 글이네요 :)
    잘 읽고 갑니다 ㅎㅎ   

  8. 현우

    2010년 11월 11일 at 6:09 오후

    난 내딸아이를 ‘아파트 킨트’로 안키울려고 신원리 산다∼
    근데
    벌써 얼음이…   

  9. 우지환

    2010년 12월 1일 at 3:45 오후

    원룸과 단칸방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원룸(?)혹은 단칸방에 사는 저로서도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단 교통수단의 이기를 이용하느라고 자연의 혜택을 잃어버려 곽기자님과 같은 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게 안타까울 뿐. ㅎ   

  10. Kenneth Hong

    2011년 1월 2일 at 11:50 오전

    1-1-11
    멀리서 읽다 하도 재미있어 다 읽느라 3 시간이나 1-1-11 을 보내는군요.
    aram1214 지금 나이때 미국에와 30 대 한국 인생을 누려보지 못한나는 104 이야기를 보며 무척이나 즐거운 하루를 보냈읍니다.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11. 石田耕牛

    2011년 1월 3일 at 11:05 오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시며 표현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면 지구의 모든 생물들이 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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