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가 알려준 ‘007 시곗줄’의 정체 – 나토밴드의 기원을 찾아서

007 시리즈 새 영화 ‘스펙터(Spectre)’ 티저 포스터가 지난주 공개됐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우연히 봤는데 반가웠다. 그저그랬다는 사람이 많았던 전편 스카이폴(Skyfall)도 나는 아이맥스로 두 번을 봤다. ‘BMT216A’ 오래된 애스턴 마틴부터 시작해 숱하게 등장하는 007 50년에 대한 오마주, 인터넷 시대에도 우리에겐 왜 늙고 지친 본드가 여전히 필요한지를 역설(力說)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포스터에서 우선 본드가 수트나 턱시도가 아닌 터틀넥을 입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몸에 착 붙어 가슴 근육을 자랑하는 터틀넥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을 비롯한 몇몇 전임자들도 영화에서 터틀넥을 입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터틀넥은 수트보다는 활동적이고 편안한 옷이다. 전편에서 존재 이유를 증명한 본드가 이번에 한결 화끈하게 돌아올 모양이라는 기대감을 들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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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 본드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곗줄이다. 포스터에서 본드는 왼쪽 손목에 검은색/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나일론 밴드(영어권에서 시곗줄을 뜻하는 말은 ‘band’보다는 ‘strap’인 듯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의 시계 애호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밴드’를 주로 쓰려고 한다)를 차고 있다. 포스터 안에서 금방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시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손목의 밴드를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이 밴드는 시계 애호가들이나 시리즈 팬들 사이에서 ‘007 나토밴드’로 불려왔다. 나토(NATO)군 보급용으로 만들어진 군용 시곗줄을 초대(初代)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가 1964년 시리즈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에서 차고 나와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껏 별 의심 없이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 포스팅을 쓰면서 좀더 조사해보니 사연이 약간 달랐다. 먼저 시기의 문제가 있다. 나토군 보급용의 ‘나토밴드’가 만들어진 것은 1973년이어서 1964년 영화에 나올 수가 없다. 이 시곗줄은 영국군용으로 생산돼 나토군에 공급된 것으로, 당초 영국군이 부여한 일련번호를 따라 ‘G10’으로 불리다가 나토군의 품목 분류번호(Nato Stock Number·NSN)를 받게 되면서 ‘나토’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지금 ‘나토밴드’는 직물(주로 나일론)로 만든 시곗줄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코너리가 ‘나토밴드’를 찼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토밴드’로 불려온 시곗줄의 원형이 1973년에 영국군용으로 나온 G10이라고 본다면 골드핑거의 시곗줄을 ‘나토밴드’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언급일 수 있다.

한 시곗줄 쇼핑몰(www.esprit-nato.com)에서 이런 내용을 정리하면서 영국 국방부(MOD)의 물자 규격 문서(DEF-STAN)를 첨부했다. 시계도 아닌 시곗줄일 뿐이지만 엄연한 군수물자인 만큼 요규 규격이 까다롭고 분명하다. 밴드 길이 280mm(해군의 잠수복 위에도 착용 가능한 충분한 길이), 두께는 1.2mm, 폭 20mm, 색상은 회색(Admiral Grey)의 단색, 시곗줄 끝과 구멍 부분에 열처리, 밴드를 여미기 위한 버클과 금속 고리 등이다. ‘골드핑거’에 등장한 시곗줄과는 여러모로 차이나는 디테일이다.

영국군의 물자 규격 요구문서 중 G10 시계용 밴드 관련 내용의 일부. 금속 고리 사이의 간격까지 꼼꼼하게 규정했다. 이 문서는 DEF-STAN 66-47/2로, DEF-STAN은 Defence Standardization이다.

영국군의 물자 규격 요구문서 중 G10 시계용 밴드 관련 내용의 일부. 금속 고리 사이의 간격까지 꼼꼼하게 규정했다. 이 문서는 DEF-STAN 66-47/2로, DEF-STAN은 Defence Standardization이다.

숀 코너리는 ‘골드핑거’ 도입부에서 잠수복 차림으로 ‘적진’에 침투해 폭탄을 설치하는데, 이 때 롤렉스(빈티지 서브마리너라고 한다)에 직물 밴드를 물려 손목에 찼다. 영국군이 G10을 만들면서 해군의 잠수복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이 장면에서 일반적인 브레이슬릿(bracelet)이 아닌 직물 밴드를 택한 것은 디테일에 상당히 신경쓴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말 그랬을까? 그보다는 잠수복에 찰 수 있는 시곗줄을  촬영이 임박한 시점에서 급히 수배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

자세히 보면 코너리가 차고 있는 시곗줄은 시계와 사이즈가 안 맞는다. 서브마리너의 러그(시곗줄을 부착할 수 있도록 시계 몸통에서 다리처럼 튀어나온 부분) 폭은 20mm인데, 코너리의 밴드는 그보다 폭이 좁다. 스프링핀이 노출된 모양을 보면 시곗줄 폭은 16~17mm 정도밖에 안 돼 보인다. 아마도 일반 시곗줄로는 잠수복 위에 시계를 찰 수가 없어서(잠수복 위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영화에 나온다) 나일론 밴드를 구했는데, 급하게 찾으려고 보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사이즈가 안 맞는 것을 그대로 화면에 내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골드핑거'의 제임스 본드가 침투할 때 입었던 잠수복을 벗자 안에서 턱시도가 나왔다. 시곗줄은 검은색/회색 줄무늬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왼쪽),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롭게 올리브 그린에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밴드였음이 드러났다(오른쪽 사진).

‘골드핑거’의 제임스 본드가 침투할 때 입었던 잠수복을 벗자 안에서 턱시도가 나왔다. 시곗줄은 검은색/회색 줄무늬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왼쪽),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롭게 올리브 그린에 가는 붉은색이 들어간 밴드였음이 드러났다(오른쪽 사진).

코너리가 찬 밴드는 줄무늬다. 언뜻 검은색과 회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골드핑거’ 블루레이판이 나온 뒤 드러난 색깔은 검은색 내지는 네이비에 올리브그린이 섞여 있고, 줄무늬의 경계 부분에 아주 폭이 좁은 빨간색도 들어간 것이었다. 한동안 검은색/회색 줄무늬 직물 밴드를 ‘007밴드’라고 판매해 오던 여러 판매자들이 ‘골드핑거’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로운 색깔의 밴드를 서둘러 확보하느라 부산을 떨었다고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번 ‘스펙터’ 포스터 외에도 이런저런 사진 속에서 검은색/회색 줄무늬의 직물 밴드를 착용했다. 그가 시계와 ‘나토 밴드’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는 50년 선배 숀 코너리를 의식한 아이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로는 가장 시기가 앞서는 ‘카지노 로얄’로 역대 본드 대열에 합류했고, 선배들과는 달리 근육이 울퉁불퉁한 악동 이미지를 창조하면서도 ‘스카이폴’에서 본드의 50년 외길에 대한 오마주를 숨기지 않았다. ‘스펙터’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이번엔 11월이 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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