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co of Assisi at Santa Fe

조그마한도시전체가황토빛의어도비양식으로지어진건물들이대부분인산타페시내의중심부에는

특이한프랑스의로마네스크양식과어도비양식으로혼합되어지어진성당이있습니다.

바로바실리아주교좌성당입니다.

원래어도비양식의성당이약200년간있던자리에산타페최초의대주교였던

라미대주교(ArchbishopJeanBaptisteLamy)가성당을디자인하고,

15년동안걸친공사끝에1884년지금의저모습대로완공하였다고합니다.

라미신부는이성당을매우공을들여서지었는데,

Mora라는산타페근처에있는마을에서산을이루며서있는돌들을

실어다가지었다고합니다.

라미대주교가프랑스출신이었기때문에이지역에서는

독특한로마네스크양식건물이된것이지요.

사진에서보는것처럼양쪽두개의꼭대기에올라갈첨탑은

아직도미완성인채로남아있습니다.

내부의양벽면에장식되어있는스테인드글라스는모두프랑스에서들여온것이라고합니다.

성당안에는예수의십자가가의길인14처가아름답게걸려있고,

성당안에있는마리아상은미국에서가장오래된것이라고합니다.

자세히성당건물을들여다보면매우정교하고아름다운문양들을보실수있으실것입니다.

성전을짓는다는것은특별한은총이없이는못하는것일것입니다.

다윗이그렇게성전짓기를원하였었지만,

솔로몬에게그것이허락되었잖아요.

믿는우리들은곧,내마음이성전이라고들하는데

과연내마음안에는진실한그분이항상임재해계시는지

조용히뒤돌아보게됩니다.

바실리아성당으로들어가는문

1848년과달루페-히달고조약으로뉴멕시코땅이미국영토가되면서

라미신부(1814~1888)가오게됩니다.

라미신부는1838년프랑스에서사제서품을받고

그이듬해인1839년오하이오주신시내티로와서사목을하던중,

1850년에산타페로가라는발령을받습니다.

오하이오주에서뉴올린스를거쳐알바커키를지나

고산지대인산타페로오는길은멀고도험란했습니다.

그당시에는이동수단이말이었으니까요.

라미신부와그의동반자였던JosephMachebeuf신부의이야기는

WilmaCather가지은소설,

<DeathComesfortheArchbiship>에자세히적혀져있습니다.

먼저자리를잡고있던멕시칸신부들과의문제점,

부당하게자기땅과종교를잃고방황하는인디언들,

그속에서순교하는사람들…

그리고JosephMachebeuf신부는초기의순교자가되었습니다.

그리고1850년교구의지시에순종하여산타페에온이후

1888년에죽을때까지산타페에서사목을하였던라미대주교는

지금이성당에묻혀있습니다.

성당앞에는세개의동상이서있습니다.

아씨시의프란시스코성인(St.FrancisofAssisi)과라미대주교,

그리고미국에서인디언으로는최초로성녀품에오른복자,

가데리데카퀴타(KateriTekakwitha1656~1680)입니다.

또하나매우귀엽게조각되어있는동상도빼놓을수가없네요.

리스트의피아노곡중에<St.FrancisofAssisi-PreachingtotheBirds>라는곡이있지만,

이동상은St.FrancisofAssisi-DancingontheWater입니다.

우리는산타페의주일아침을,이성당에서아침미사를보는것으로시작하였습니다.

주례사제는젊은멕시칸신부였습니다.

아침10시미사였는데도커다란성당안에얼핏보아도천여명의신자들이

빼꼭히들어앉아있었습니다.

미사가시작되기전에신부께서지금여행중인사람들은손을들어보라고하니까

거의대부분의사람들이손을들었습니다.

그리고미사가시작되기전에신부님께서한부부를축하해주셨는데

바로결혼50주년을맞아여행온부부였습니다.

이들에게는미사후에도다시특별히기도를해주셨습니다.

미사가끝난후한무리의연주단이들어왔는데

바로이들을축하해주기위한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여행패키지에들어있는듯도해요.

성당밖으로연주단을따라걸어가는노부부와그들의친지들입니다.

참,부러운광경이었어요.ㅎㅎ

지금배경으로들리는곡은구노의아베마리아입니다.

조선후기제5대조선천주교교구장을지낸

프랑스신부마리다블뤼(MarieNicolasAntoineDaveluy1818~1866)와

천재적인음악가샤를구노(1818~1893)의관계를아시고계십니까?

학교에다닐때음악신동이었던구노가도저히따라잡을수없었던사람이있었는데

그사람은다름아닌마리다블뤼였습니다.

하지만다블뤼는구노처럼대학교를음악학교로진학하지않고신학교로들어갑니다.

그리고조선대주교주교로임명되어조선에발령이되어

1845년김대건신부와함게조선으로들어와서활동을하다가

1866년3월30일병인박해로잡히어참수를당합니다.

프랑스에서그소식을들은구노가성당으로달려가친구다블뤼를위하여

성모마리아상앞에서눈물을흘리며기도를드렸는데,

그후다블뤼를생각하며쓰여진곡이바로이곡이었다고합니다.

우리나라에서신앙을지킨엥베르주교,다블뤼주교및

우리나라의성인성녀들이피의댓가로지켜진신앙으로인하여

나는지금아주편안한신앙생활을하고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신앙은내게거저주어진것이절대로아닙니다.

우리나라순교자들이목숨을내걸고지킨신앙을

자랑스럽게여기며

나는,

증언과증거의삶을살아나가야할것입니다.

9월은한국의전례력으로순교자성월.

순교자로부터받은커다란선물을가슴가득히부여안아보는,

순교자성월의마지막주일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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