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2의 금융그룹 바클레이스는 지난해 말 가까스로 금융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중동 투자자들로부터 약 73억 파운드(약 15조원) 투자를 유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자칫 미국의 리먼브러더스(파산보호 신청)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클레이스를 살린 이 73억 파운드 투자거래를 성사시킨(clinch the £7.3 billion deal) 장본인(the very author of the deal)이 보스니아 내전 피란민 출신의 한 여성(a woman refugee from Bosnia)인 것으로 밝혀져 화제다.
다이애나 젠킨스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현재 억만장자인 바클레이스은행의 중역 로저 젠킨스(52)의 부인으로 올해 36세다(36-year-old wife of multi-millionaire Barclays Bank executive Roger). 언뜻 보기에 애당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태어난 여성처럼 보인다(seem born to be in the spotlight).
- ▲ 다이애나 젠킨스(오른쪽)와 그녀의 남편 로저 젠킨스(왼쪽)
그녀는 요즘 런던 상류사회 파티(the high society parties in London)의 명사로 꼽힌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수백만 파운드짜리의 번쩍이는 다이아몬드(glittering diamonds worth millions)와 흰색 밍크(white fur)는 영락없는 귀부인 자태를 보여준다.
카타르 왕족을 매료시켜 지난해 12월 73억 파운드 투자에 참여토록 이끈(charm the Qatari royal family into parting with £7.3 billion last December) 이가 바로 이 여성 다이애나였다.
다이애나가 이끌어낸 중동의 투자 약속(the Middle East investment deal)은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at the height of the credit crunch) 남편 젠킨스의 회사 바클레이스를 구해(rescue her husband’s employer Barclays)냈다. 구체적인 배경이나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다이애나가 중동 왕족들을 설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play a vital role in persuading the royal families of Middle East countries)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들 부부에게 세인의 이목이 쏠리게 하는(thrust them into the public eye) 계기가 됐다.
남편 젠킨스는 다이애나보다 좀더 내향적이어서(be more retiring than Diana) 여기 저기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do not want to be out and about) 스타일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일반 대중과 상류사회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오히려 반기고 있다.
최근 다이애나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후덕한 사람들을 설득해 좋은 명분을 위해 자신들의 돈을 베풀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사회네트워크 기여자(as a social networker with a startling ability to persuade the great and the good to part with their money for good cause)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최근 런던 고급주택지인 메이페어의 자택에서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 매트 데이먼, 마이클 케인, 스칼렛 조한슨, 록그룹 U2의 리드싱어 보노 등이 참석한 파티를 주최(mastermind a party with a guest list including George Clooney, Matt Damon, Sir Michael Caine, Scarlett Johansson, Bono and so on)해 수단 다르푸르 난민들을 위한 1000만 파운드(약 208억원)의 기금을 조성(raise £10 million for Darfur’s refugees)했다.
2주 전에는 엘튼 존의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들을 위한 연례 여름 공연에서 가수 저스틴 팀벌레이크가 노래를 하도록 초치하는(persuade Justin Timberlake to sing two weeks ago at Sir Elton John’s annual summer party for his AIDS charity) 데 성공, 에이즈 환자 기금 마련을 돕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눈부신 사회 활동 솜씨와 유명인사들과의 교제 명단에도 불구하고(despite her dazzling social prowess and the list of famous contacts) 정작 그녀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little is known about her).
그녀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give her own account)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5일(현지시각) 일간지 데일리 메일을 통해 자신의 자선사업 배경이 된 애끓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reveal the heartbreak that lies behind her philanthropy).
다이애나는 보스니아의 중산층인 이슬람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be born to middle-class Muslim parents in Bosnia) 다정한 가족 속에서 자라났다(grow up in a very loving family). 부모는 물론, 남동생 어니스와도 각별히 절친했다(be very close to her younger brother, Irnis). 정말 행복한 어린 시절(a really happy childhood)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전쟁(보스니아 내전·1992~1995)이 일어났고, 세르비아와의 이 전쟁은 나라와 가족을 갈기갈기 찢어(tear the country and her family apart)놓았다. 사라예보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공학 학위를 받고 졸업한(graduate from the University of Sarajevo with a degree in economics and social engineering) 그녀의 미래도 함께 무너졌다.
한때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사라예보(Sarajevo, once part of Yugoslavia)는 4년 동안 현대사에서 가장 긴 군사적 포위공격을 견뎌야(endure the longest military siege in modern history) 했다. 세르비아계는 이슬람 교도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1만5000여명의 주민이 사망했다. 그 중 최소한 1500명은 어린이들이었다. 다이애나는 “먹을 것도, 전기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외부로 도피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떠나려(leave without her husband and son) 하지 않았다. 가족과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며 버텼지만 결국 다이애나 혼자 보스니아를 떠나야 했다. 딸이 세르비아계 민병대로부터 유린 당할 것을 우려한 아버지가 다이애나에게 도망칠 것을 간곡히 부탁했기(beg her to run for her life)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바이케이드 사이를 뚫고 탈출(escape through barricades), 무작정 걷거나 버스를 타고, 또는 다른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며 가까스로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다이애나는 자선활동이나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살아나가야(live off charity, off any help) 했다. 그런 와중에 친구, 삼촌, 큰 조카를 비롯해 보스니아에 있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 들었다(hear of people dying all the time).
그러던 중 부모와의 연락이 끊어졌다(lose contact with her parents). 다이애나는 지금도 그 때의 두렵고 암담했던 기억(the memory of that frightening and isolating time)을 잊지 못한다.
다이애나가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993년. 수중에는 돈 한푼 없었다. 영어를 할 줄도 몰랐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영국 내무부에 신고하러 갔더니(report herself to Home Office) 종이 한 장을 내주는데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do not figure out what to do) 애를 먹었다.
이후 다이애나는 일거리를 찾아 사방 팔방 헤매고 다녔다(go round looking for jobs everywhere). 세탁소 일도 하고, 식당 일도 거들었다.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정말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do everything really just to survive)”고 한다. 사라예보에서 취득한 학위가 있었지만, 런던에선 소용이 없었다(be useless in London).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have to start all over again)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일했다(clench her teeth and dig into the job). 가족들을 런던으로 데려오고(bring her family to London),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하기(make something of her life) 위해서였다.
영어 강의를 듣기 위해 야간학교를 다니며(go to night school for classes in English) 컴퓨터 학교에도 나갔다. 얼마 후 시티대학교에 장학금을 신청했지만(apply for a scholarship to City University) 퇴짜를 맞았다(be turned down). 입학시험에는 합격했기(pass the acceptance test) 때문에 대학에 다니는 내내(while she puts herself through university) 일을 하며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컴퓨터공학과를 우등으로 졸업(get an honors degree) 했다.
1995년 남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 했다. 전쟁이 끝나기 8일 전, 21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살해됐던(be killed eight days before the end of the war and just short of his 21st birthday) 것이다. 다이애나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 때 충격 때문이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사물의 밝은 면만 보면서(look at the bright side)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며(help people that need her help) 사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위로와 안정이 절실할 때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 젠킨스였다.
전 부인과 별거 중이던 젠킨스는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다(be not this wealthy man). 하지만 1999년 두 사람이 결혼한 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젠킨스는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다이애나가 큰 도움을 줬다(help him to smooth his path to a number of lucrative deals)고 말한다.
자신에게 없는 사회적 기술을 다이애나는 갖고(possess the social skills he lacks) 있다는 것이다. 이 번에 바클레이스에 대한 73억 파운드의 중동 투자를 확보할 수 있게 한(help to secure the £7.3 billion Middle Eastern investment) 것도 다이애나가 카타르의 셰이크 하마드 알타니 총리의 부인과 친분을 쌓아놓은 덕분(thanks to her cultivation of a relationship with the wife of Sheik Hamad Al-Thani, the prime minister of Qatar)이었다고 한다.
젠킨스는 다이애나가 자신의 상담역이자 고문(a consigliere and counselor)이라고 말한다. 그 덕택에 젠킨스는 지난 2005년에만 약 7500만 파운드(약 1550억원)를 벌어들여(earn an estimated £75 million in 2005 alone) FTSE 100(런던증권거래소 상장) 기업의 역대 최고 소득 직원(the highest-paid employee of a FTSE 100 company ever)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난 지금 다섯 살과 여덟 살 두 자녀의 엄마가 된 다이애나는 런던뿐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헐리우드 특급배우들을 자신의 자선사업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명성을 날리고(make something of a name for herself for roping Hollywood A-listers into her philanthropic projects) 있다.
지난 2006년엔 1970년대 그룹 예스의 멤버였던 존 앤더슨의 사진작가 딸(the photographer daughter of Jon Anderson, singer with Seventies band Yes) 데보라 앤더슨과 함께 ‘Room 23’이라는 유명인사 사진책을 펴냈다(collaborate on a celebrity photographic book, Room 23).
다이애나는 자선활동을 위한 이 책을 위해 도널드 서덜랜드, 신디 크로포드, 조지 클루니, 키드 락 등과 같은 많은 스타들을 설득해(persuade a host of stars such as Donald Sutherland, Cindy Crawford, George Clooney and Kid Rock) 비벌리 힐스의 페닌슐라 호텔에서 사진을 찍도록(to have their pictures taken in the Peninsula Hotel, Beverly Hills, for the book, in aid of charity) 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 같은 그녀의 자선활동들은 보스니아 및 요란한 팡파르나 홍보 없이 설립한 한 재단에 뿌리를 두고(the roots of her philanthropy lie in Bosnia and in a foundation she set up without great fanfare or publicity) 있다.
다이애나는 동생과 고향 이름을 딴 어니스 카틱 재단(Irnis Catic Foundation)을 설립, 사라예보 대학병원에 각종 의료 기기와 인큐베이터들을 기증하는가 하면, 보스니아를 위해 활동하는 국제 기구나 해외 단체에 수십만~수백만 파운드를 기부하고 있다.
1997년 딸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그녀의 부모들도 딸의 자선사업을 적극 돕고 있다.
다이애나는 “1995년에 내 남동생을 데리고 나오도록 누군가에게 보내줄 5000달러만 있었으면(if I’d had $5000 to send to somebody in 1995 to get my brother out) 그 아이는 지금도 살아있을 것(would be still alive)”이라며 “내가 평생 자선사업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내 남동생처럼 살릴 수 있는 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김남교
2009년 7월 7일 at 2:16 오후
귀글 " 컴퓨터공학과를 우등으로 졸업(get an honors degree) 했다."에서 우등으로 졸업의 "honours degree"는 우등이 아니고 보통에 속하는 학위입니다 즉 first. upper second.lower second. third.이렇게 다 합해서 honours에 속하고 다음의 ordinary는 학위에 들지도 못하는 수학증서입니다 그리고 영국에는 honours degree는 있어도 귀 번역 글 처럼 honors degree는 없답니다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