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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조선왕실소송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정명섭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월

조선에도 변호사가 있다?

처음 이 책에 대한 제목이 무척 생소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 살아가는 곳에는 필히 있어야할 만 한 존재란 사실에 수긍이 가며 그렇다면 어떻게 조선왕조 오백 년이란 역사 속에서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과연 지금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이 책은 땅에 관한 소송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그것도 원고는 백성이요, 피고는 조선왕실이다.

전라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하의도란 섬에 살고 있는 이차돈, 윤민수, 임성찬은 힘겹게 한양으로 올라온다.

 

외지부, 즉 지금의 변호사란 직업으로 불리는 업을 삼고 살았던 주찬학이란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그는 지금 난월이란 퇴기 기생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중도미 역할을 하며 노름과 술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세 사람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소송을 대신 맡아줄 것을 의뢰하는데, 주찬학은 거절한다.

 

무릇 옥송이 지체되는 것은 오로지 교활한 무리들이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외지부라고 부르는 자들은 항상 관문에 서서 소송인들을 몰래 사주하거나 또는 스스로 송사를 대신하여 시시비비를 따집니다. 때문에 관리들이 이들의 농간에 빠져 제대로 판결을 내릴 수 없사옵니다. 외지부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모두 체포해서 엄벌에 처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성종 95권 9년 다섯 번째 기사

 

 이처럼 당시 외지부라 불린 자들은 성실하게 대리 소송을 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이익을 앞세워 소송 당사자들을 부추김으로써 나라 입장에선 골칫걸이에 속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변방으로 내쫓기었으나 이제는 소송인의 친척임을 내세워 송사를 담당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던 바, 주찬학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지지 않았던 외지부였다.

 

그런 그가  세 사람의 호소에 반대한 것은 상대가 일반 백성이나 양반도 아닌 바로 왕실 소속의 땅을 갖고 재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 앞에 파리처럼 보이는 자신들의 사정이 훤히 보이기 때문-

 

하의도란 땅은 인조 반정 이후 정명 공주가 홍씨 집안으로 하가를 함으로써 왕실에서 홍씨 일가에게 땅을 선사한 바, 문제는 100년이 지난 영조 6년이 되도록 왕실 집안의 마름들의 온갖 횡포와 도조, 그리고 그들의 땅이 아닌 하의도 백성 자신들이 스스로 개간해서 일군 땅마저도 세금을 물어내게 하는 악행을 견디다 못해 나주 관찰서나 광주까지 가서 하소연을 했건만 들어주지 않자 한양까지 올라와 소송을 걸게된  비운의 땅인 것이다.

 

과연 이들은 자신들의 뜻을 국가가 들어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일련의 소송 과정이 지금과 거의 비슷하고, 거대 권력 앞에 열심히 살아가려는 백성이 지닌 힘없는 서글픔, 그리고 자신들의 손아귀에 주어진 그 어떤 것은 당파를 떠나서 결코 내놓으려 하지 않는 권력의 비리와 생태, 그리고 여기에 부성애마저 저버리는 냉혹한 홍 대제학의 모습이 계급 차이에서 오는 한계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서자의 비애마저 함께  느낄 수가 있는 책이다.

 

말 한끝의 차이 때문에 승소가 엇갈리는 애매한 기준의 근거와 이런 소송을 승소하게 한다면 제 2 . 3 의 또 다른 재판이 줄줄이 이어질 것을 염려하는 권력자들의 탐욕들이 서로 간의 이익과 계획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결코 변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야욕과 지위를 이용해 또 다른 주장을 드러내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장치라는 명목 하에 상소를 올려도 그것이 왕에게 도달하기 전에 이미 싹을 잘라버리게 하는 무시한 일련의 상황들은 실제 이 사건을 관심 있게 들었던 작가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 역사 소설 속에 허구와 진실이 섞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만나 볼 수 있게 된 작품이다.

 

뚜렷하고도 후련한 해결책이 없는, 그나마 한 가지 희망을 가지게 된 하의도 사람, 윤민수와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또 다른 외지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주찬학이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당시 조선에서도 일련성 있게 지방과 한양 간의 정보 전달법이라든지, 문서를 보관하고 그것을 열람하는 방법 등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대로 돌아간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재미를 주는 책이기도 하면서 읽으면서도 내내 답답함을 가지게도 하고 윤민수의 마지막 변론 장면에서 눈물이 나기도 했던, 가슴 찡한 책이다.

 

“저와 함께 송사를 하러 온 하의삼도 주민들은 한양은 커녕 뭍에도 올라온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주목의 관할이긴 하지만 나주목사를 평생 뵐 일도 없었습니다. 섬에 산다는 건 바다를 옆에끼고 외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 섬에서 가장 비옥한 땅은 홍씨 집안에서 소유했고 섬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자식들까지 굶길 수는 없다면서 돌과 흙을 날라서 바닷물을 막아 땅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땅은 소금기 때문에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흙을 날라다가 땅을 다져서 소금기를 없앴습니다. 그렇게 바다를 막고 흙을 메워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만드는데 무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고생했을 때에는 모른 척하던 이들이 슬그머니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섬 전체가 자기들 절수지니까 도조를 납부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미 민전에 등록되어서 나라에 전세와 삼수미를 바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얘기는 듣지도 않았습니다. …(중략)

 

” 한양에 가면 송관이 법에 의지해서 공명정대하게 판결해주리라 기대한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법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부당하다고 외치면 그게 맞는 얘기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틀리다고 하면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면 간악하다는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제가 한양에 올라와서 절망한 건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데에 아무도 관심이 없고 천릿길을 달려온 우리들의 얘기 역시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략)

 

 틀렸다고 말씀을 하시기 전에 부디 우리들의 이런 간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 p 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