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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웃으면서 죽음을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가끔 가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우선순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꼽아보게 되었는데, 아마도 중학교 시절로 기억이 된다.

아버지의 친한 고향 분이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단 부고를 엄마에게  얘기하시던 모습을 보던 충격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속된 말로 죽마고우를 ~친구로 불리는 말이 있을 정도의 친분이 있던 고향 친구였던지라 아버지에겐 꽤 충격이 크셨을 것 같고 나의 입장에선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란 타이틀을 단지가 엊그제 같은데 내 또래를 둔 가장이 세상을 저버렸단 소식은 곧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했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순간 소름이 끼치고 새삼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선 그만큼 고맙고 소중하게 느낀 적은 없었을 터, 영국의 유명 작가인 줄리언 반스가 죽음에 대해 에세이를 펴낸 책을 통해 다시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우리 인간들의 자세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목이 참 반어적이다.

어떻게 죽음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긴 문화가 다르다 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가문과 태어난 나라의 영향에 따라 달리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하는 한편의 다른 생각들을 해보기도 한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린다.

쉽다는 사람, 쉽지만은 않다는 사람, 내 경우엔 쉽지만은 않은데, 이게 묘하게도 작가와의 심리전이라고 할까, 왠지 모르게 당신의 작품이 아무리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해도 나는 제대로 읽어낼 거란 심리가 깔리면서 읽다 보면 그가 쓴 글 구절을 통해 무릎을 치게 될 때도 있어 이런 맛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대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 또한 쉽게 읽히진 않았다.

첫째로는 죽음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렇고 글의 내용이 쉽게 쉽게 흘러가는 타입이 아닌 영국 사람 특유의 씨~익 살짝 웃게 만드는 곳곳의 유머가 들어 있어 이해를 하면서 읽기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 작품에서도 밝힌 부분들이 조금씩 들어 있지만 작가는 서양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무신론자에 이어서 불가지론 자란 말로 자신의 종교성(?)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몽정으로 인한 경험을 토대로  신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의문점으로 시작된 신과 자신의 존재 인식은  죽음이란 것을 대하면서 왜 종교를 갖지 않게 됐는지에 대해, 이후 이러한  내용들을 읽다 보면  저자의 가족 전체의 영향이 있는듯하다.

철학과 교수인 형도 그렇고 돌아가신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죽음을 바라 본 당사자인 저자의 글에서 나온 내용인 만큼 종교에 대한 생각이 아주 솔직하면서 신기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아니 설령 인지는 한다 해도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들이 어린 기억의 잔재로 남는 경우는 드물고, 커가면서 마주하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은 때론 일부러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실은 우리 인간들 모두는 애써  죽음을 곁에 두고서도 멀리 있는 어떤 형상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된 자신의 조상부터 유명 인사들의 죽음을 다루고 다시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진 이 책을 통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자신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특별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막상 죽음이란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는 특별함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렇기에 더욱 죽음에 대해 마주하는 자세와 앞으로 내게 닥칠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저자의 색깔을 느끼게 해 주는 구절들과 더불어 친근하게 다가온다.

 

죽어봐야 죽음 이후에 어떤 삶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없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한계를 넘어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란 말이 있듯이 죽음에 대한 체념과 남아 있는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아낌없이 즐기면서 건강하게 살아가자고 하는 말들이 제목과 맞닿아 있다.

 

며칠 전에 일간 신문 보도에서 읽은 기억이 생각난다.

죽은 망자에 대해 회고하면서 그(그녀)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네의 정서와는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생전에 살아 있었을 당시 고인이 한 말의 유머를 다시 재생하면서 이미 고인이 된 자를 즐겁게 기억할 수 있게 한 짧은 유머가 실상은 어둡고 침침하고 우울함에 찬 분위기를 잠시나마 비껴가게 할 수도 있다는 작용을 해주고 있구나 ~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없이 닥치게 될 죽음이란 문제, 그렇다면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닌 어떤 자세로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습관화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예기치 못한 때에 엄습해온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과 친해져야 하며, 그 한 가지 방법은 글로 쓰는 것이다.

 

난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게 나이 든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좀 더 빨리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어리석은 실수를 할 확률도 줄어들 것이다.” – -쇼스타코비치-

책 구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데 아마도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생각 때문에 곡 분위기도 이런 영향을 받아 작곡한 것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기억이란 소재가 반가울 법도 한, 형과 그가 나누는 일말의 짧은 단상의 기억들이 각기 달리 기억된다는 점, 기억과 실제에 대한 생각을 다시 떠올려보게 되는 책이기에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소설이 아닌 에세이의 형태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종의 기원

종의 기원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이 ‘내 심장을 쏴라’였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책이 그야말로 홀릭이란 말이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할 정도의 짜릿함과 서늘함, 가슴 시린 아픔을 동반한 이야기의 구성들은 정말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느낌을 대했다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후부터 그녀의 처녀작을 비롯해 28, 7년의 밤까지 섭렵하면서 그녀의 작품세계로 푹 빠졌던 터라 이번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음에도 왠지 바로 읽고 싶지 않은, 좀 더 뜸을 잘 들이다가 맛난 밥을 먹고 싶다는 유혹처럼 책을 미적미적 대하게 된 경우가 이에 속한다.

 

책의 제목인 ‘종의 기원’도 선뜻 다가서지 않게 한 점도 있었지만 책의 소개 코너에서 잠깐 훑어본 바에 따르니, 왠지 섬찟하다는 느낌이 더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연일 방송에서 묻지 마 살인 소식이 들리고 이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동참도 이어지고 있지만 막상 범인을 잡고 물어보면 원한이 있다거나 상대방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 그야말로 전형적인 묻지 마란  말이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기가 막히다는 심정이 앞선다.

 

저자는 책 뒤 말미에 인간이 지닌 품성 중에 ‘악’이란 감정을 품고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유전자의 기질로 인해 인간 모두가 이러한 기질을 갖고 있지만 전형화된 틀에 갇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사회적인 절제와 행동들 때문에 다분히 그것을 안에 고이 숨긴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에 대해 주목한 점을 소설로서 드러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이코패스들의 행동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범주를 벗어난 훨씬 고지능적이고 자신조차도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채 벌인다.

혹은 이미 알고는 있으나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행동에 다다르게 되면 자신의 머리 속의 그 어떤 유전적인 폭발의 힘에 의해서 의지를 제어할 수 없거나…

 

유진이 그런 인물로 그려진 가운데 사이코패스 가운데서도 최상위라 불리는 포식자, 프레데터란 기질을 가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처음 도입부부터 섬뜩하게 다가온다.

 

어떤 기이한 냄새, 바로 피 냄새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유진은 로스쿨 발표를 앞둔 26살의 청년이다.

아버지와 형을 잃은 후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그는 죽은 형의 이미지와 똑같이 생긴 해진을 양자로 입적시킨 엄마의 뜻에 따라 형과 아우로 지내게 되고 자신의 오랜 간질로 인해 복용해 온 약을 인위적으로 끊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개병’에 시달린다.

 

어두운 밤이 되면 뛰쳐나가야 직성이 풀리고 한바탕 주위를 돌고 온 후에 미친듯한 잠에 빠지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엄마와 의사인 이모에 의해 전적으로 성인이 되기까지 이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살인을 차분히 되새기면서 살인 상황 정황과 그 처리까지 보이는 소설 속의 절차들은 주도면밀하게 그려진다.

 

어린 시절부터 내재해 있던 그의 품성을 알아본 이모는 과연 그 어린아이에게 약을 투여해야만 비약적인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엄마가 쓴 메모를 들여다보면 엄마로서 아들을 바라보는 착잡한 심정이 유진이 그대로 납득할 수 있게끔 행동과 말을 해주었더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모자간의 서먹한 기류들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게 된 장면들이 들어 있어 읽는 내내 아!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동물들의 세계는 꼭 필요한 먹이만큼만 잡아먹는 먹이사슬의 행태가 유연하게 이뤄진 생태계다.

그런 반면 인간들의 세계는 비록 동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능의 발달과 그의 영향으로 ‘사회적인 동물’ 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지만 과연 인간들은 사회적인 동물일까?를 이 책은 묻고 싶게 만든다.

 

성악설이니 성선설 같은 말도 있지만 이 책에서 유진이 보인 행동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이미 저지른 살인에 이어서 그것을 마무리하고 또 다시 시작되는,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소름 끼치는 침착하고 냉철한 행동과 계산을 볼 때면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 군상들의 원초적인 유전 안에 이러한 점들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그런 여건에 맞부딪친다면 과연 평범한 사람들은 유진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전작들이 악의 전형적인 인물들을 내세웠다면 이 작품은 제목처럼 악의 기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그 악을 지닌 인물은 그 기원에 어긋남 없이 저지르는 행동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명칭을 얻게 되는 과정들을 그린 것이라 처음 도입부부터 시작되는 냉기 서린 피 냄새는 책을 끝마칠 때까지 가실 줄을 모르게 한다.

 

엄마와 이모에 대한 원망을 넘어선 분노, 그 분노의 발산을 억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자신의 꿈마저 이루지 못하게 했던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이 좀 더 이른 때에 제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유진의 유전은 이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 본다.

 

글의 전체 구성이 유진이 다시금 땅을 밟게 되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수영선수 출신) 글이 진행되기에 작가가 빈틈없이 글을 쓰려했다는 노력이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가상의 신도시(전작도 그렇지만)인 군도 시도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실체를 통해 한 인간의 내면에 깃든 악의 기원이 어떻게 행동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왜 작가가 많은 제목들 중에서 종의 기원이라고 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작가다운 글이란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