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1)
세종,영조,정조라고불리는임금의이름은임금의재위당시불린이름이아니다.임금이죽고나서사당에붙인이름(이른바묘호廟號)이다.임금의뒤에있는조祖와종宗은임금의치적을감안하여붙인이름인데,나라를열거나중흥적큰업적이있으면’조’선대임금을잘이어받았으면’종’을붙인다.
혜경궁홍씨는사도세자를경모궁으로부르고있다.
1728영영조의맏아들이자경모궁의이복형인효장세자가죽고,세자의자리가오래비니영조께서밤낮으로근심하셨는데1735년1월선희궁(사도세자의어머니)께서경모궁(사도세자)를낳으시니영조는물론인원왕후(숙종비),
정성왕후(영조비)기뻐하시니라.
경모궁께서는체격이장대하시고효성스럽고우애가깊으시며총명하셨다.
영조께서동궁이오래비어있음을염려하시다가경모궁을얻으시고기쁜마음에부모자식이멀리떨어져사는사사로운정은돌아보지않으시고,경모궁이나신지백일만에탄생하신집복헌을떠나.보모에게만맡겨져오래비었던저승전이라하는큰전각으로옮기시니동궁이드실전각이다.
저승전은영조나생모이신선희궁이거처하신창경궁집복헌과는멀었다.매일영조와선희궁이날마다오셨지만한집에서양육하시며교훈하는것과같으리오.
경종은소론의지지에힘입고있었고,영조는노론의지지를받았다.
그러므로영조가등극하자소론은실권하였고소론과밀접했던경종의대전내인들은궁밖으로나가야했다.
그런내인들을사도세자의동궁으로다시부른것이다.이유는그들의잘못을씻어주고불만을진정시켜화기和氣를끌어내겠다는뜻이었다.
영조는노론이었지만동궁(사도세자)내인들은경종(영조의이복형)의내인들로사도세자가
친소론적경향을가지게되었다.그로인해노론과틈이생겼다.
동궁의내인들은선희궁(사도세자어머니)의어릴적일만생각하여업신여기고말도공손치않으며헐뜯기도하니
선희궁과영조가그눈치를알고동궁에가고싶어도내인들보기싫어가시는일이줄어드니라.
선희궁은6살에궁궐에들어와서른한살에영조의정식후궁이되었다.한때기세가높았던경종의내인들에게는여전히보잘것없는사람으로여겨졌을것이다.경종의내인들이선화궁을무시한이유가여기있을것이다.
영조와선희궁이동궁에자주오지않으니어린사도세자는놀이에빠지기시작했다.
3-4년후에영조가한상궁을내쫓고나서,너른집에어른의보살핌이없이보시는것이궁녀와환관뿐이라.배우는것이무엇이있으리오.경모궁께서는덕성은거룩하시나과묵하시고행동이날래지못하시니라.성품이이처럼다르시니경모궁께서하시는모든일이부왕(영조)의마음에들지않으시니라.
이리대답하여어떠할꼬,저리대답하여어떠할꼬하시며즉시대답을못하여영조께서매양갑갑해하시니이것이또한큰원인이되니라.부모자식간에는흉허물이없어야할것인데영조께서는그렇지않으신지라.
내(혜경궁홍씨)들어와형편을보니예법이무거워털끝만큼도사사로운정에매이지않으시니내두렵고조심스러워일시도마음을놓지못하니라.경모궁께서도부왕께친애는뒤지시고두려움은더하셔서아직열살된아기로되감히마주앉지도못하시고신하들처럼몸을옹송글뵙던것이니어찌그리과하시던고싶더라.
영조는좋은일과좋지않은일을하실제는출입하는문이다르고,사랑하는사람이있는집에사랑하지않는사람이함께있지못하게하시고사랑하는사람이다니는길을사랑하지않는사람이다니지못하게하시니라.
영조의큰딸은무척예뻐했고,첫아들(효장세자)는죽고,아들을기다렸으나또딸(화엽옹주)을낳았다.
영조가화엽옹주를미워했다.경모궁(사도세자)이화엽옹주와나이가비슷하고부왕(영조)께사랑을잃은처지가같아서불쌍히여겨사랑하심이자별했다.
영조가좋아하는사람을만날때는정사政事하실때입던옷을벗으시고인견의복으로갈아입고만났지만
미워하는사람을만날때는정사政事할때옷을그대로입고만났는데옷을갈아입지않고경모궁(사도세자)를부르신후’밥먹었냐?’한마디묻고는경모궁(사도세자)가대답하면그자리에서귀를씻으신후그물을사랑하지않는화엽옹주있는쪽으로버리시니라.경모궁(사도세자)께서화엽옹주를대하시면
"우리남매는귀씻을준비물이로다"하고서로웃으시니라.
한달에여섯번신하를불러정무를듣는치대는보름전에는영조께서직접하시고보름후에는경모궁(사도세자)을시좌캐하시고동궁혼자세번을하시니라,동궁(사도세자)가곤란한일을영조에게물으면
"그만한일을결단치못하여내게취품캐하니대리시킨보람이없다’하시고
또어떤일을취품치않으면"그런일을어이내게취품치않고스스로결정하나"라고꾸짖었다.
백성이얼어죽거나가뭄으로천재지변이있으면"소조(사도세자)에게덕이없어이러하다"하니라.
경모궁(사도세자)가또무슨꾸중을하실까근심하여사사건건두려워떨고이로인하여나쁜생각이나니
이것이병의싹이라.경모궁(사도세자)께서한번꾸중에놀라시고두번격노에근심하시니한가지일도
자유롭지못하시니라.
헤경궁홍씨가첫아들의소를낳았는데어깨에푸른점이있고,배에붉은점이있어죽은화평옹주가환생한것이라믿고영조와선희궁(사도세자생모)가귀히여겼으나의소가죽으니라.
다시임신하여정조가태어나시니인물이우뚝빛나시고골격이준수하니하늘이내신진인眞人이라
경모궁(사도세자)와우애가깊었던화엽옹주가홍역으로죽으니라
홍준해의상소로영조가크게격노해서세자에게전위(왕위를물려줌)하겠다는전교(임금의명)을내렸으나인원왕후께서말리자선화문에엎드려대비께허락을받고자하시니라.경모궁(사도세자)께서전교(임금의명)에놀라한겨울취위에며칠을엎드려죄를빌었는데홍역을겨우이긴끝이었는데설한이혹독한눈속에엎드려대죄하시니
눈이쌓여엎드리신것을분간치못할정도가되니라.
전위사건은이러하다.
후궁문씨가임신육칠개월이되었는데문씨가아들을낳으면왕통이바뀔수있다고생각했다.
문씨가선화궁(사도세자어머니)에게불손한말을많이했는데이를안인원왕후(영조어머니)가문씨를불러무릎을꿇리고,사도세자를불러세자가보는앞에서문씨를회초리로때렸다.이사건다음날전위문제를꺼냈다.전위사건의배경에어떤다른설명보다설득력이높다.
사도세자는친소론적이었는데노론들이그것을꺼려죽음으로몰았고,노론의딸인혜경궁은친정을위해남편을고아인으로만들었다는것이다.세도세자가13년이상을국가의최고정무를대신했음을들어사도세자의심각한병증을부정하고있다.
사도세자가뒤쥐에갇힐때윤숙이바닥에머리를찧어얼굴이피범벅이된상태로"병이있어그랬을뿐이오"라고사도세자의옹호했다.윤숙은소론이다.사도세자를죽음으로몰아간쪽은노론쪽이다.
경모궁의병환이참이상하니임금뵈실적과신하대하실때는평상처럼예사로우니일이급할때는병환이남이다알게나타내었으면싶더라.
세자는병이점점심해져세자수업도더드물게받으시고취선당밧소주방(잔치음식따위를만드는곳)한집이깊고고요하다하시며그곳에많이머무시니어느일인들근심이아니며애태우지않으리오.
영조가갑자기낙선당으로경모궁(사도세자)를보러가셨는데경모궁은세수도제대로하지않고옷도단정히입지않으셨더라.당시는금주령이엄한때라,영조께서세자가술을마셨다고술들인이를찾으라고했으나
누구하나경모궁이술먹지않은것을말하지않았다.영조가계속몰아세우니사도세자가먹었다고대답을한다.상궁이영조에게"술잡숫는다는말씀은지극히원통하니술내가나는가맡아보소서"하니
사도세자가상궁을꾸짖으니영조가격노하며
"내앞에서상궁을꾸짖으니어른앞에서는개나말도꾸짖지못하는데어찌그리하는가"
경모궁(사도세자)가"아무리해도못살겠다"하고저승전앞뜰우물에가서떨어지려했다.
인원왕후칠순에과거시험에이어후원뜰에서잔치를열었는데경모궁도참여캐하시니그잔치를무사히지내고아주좋아하시니라.1756년8월에처음으로숙종릉에따라가니기분이시원하신듯하더라.
정성왕후(사랑받지못한왕비)
영조와결혼한첫날밤영조가정성왕후의손을잡고손이참곱다고하니귀하게자라서그렇다고대답했다는것이다.영조는그답변이자신의출신을비웃는듯느껴져서그날로왕후에게정을잃었다고한다.영조의어머니숙빈최씨가각심이(궁녀들의시무름꾼)였는지는확실치않지만궁중의낮고천한여자였음은분명하다.혜경궁은같으노론출신이라정성왕후와친근감을가지고있었다.
인원왕후(숙종의계비.은인.)
숙종의계비로경종제위시왕세자로있었던영조(영조의어머니는무수리출신)는소론측으로부터위협을받았는데인원왕후는왕세자(영조)살해음모사건에단호히대처하는등영조가위기를극복하고왕위에오를수있게하였다.
p.s:국사나세계사는인물이나연대를외우기가힘들어서싫어했던과목입니다.
여기로이사오고수원화성,용주사,융건능을자주다니다보니사도세자에관해관심이높아졌고
영화’사도’롤보고나서한중록을읽고싶다고생각했습니다.
제목만보면읽기가힘들것이라생각이들었는데의외로편하게읽고있습니다.
인물이름외우기가힘들어서앞뒤로여러번왔다갔다는하고있지만정독을하고있습니다
지금현제1/6이나1/7쯤읽었으니가총5-6번쯤한중록을간추려서올릴생각입니다.
이렇게쓰지않고읽으면쉽게읽혀지긴하겠지만다읽고나면무엇을읽었는지잊을것같아
차근차근정리해가며읽을생각입니다.책을많이는읽지못해도꾸준히읽는할매가되고싶습니다.
읽으면서혜경궁홍씨가쓴것이라서완전히중립적인시각으로쓰진못했을것이란생각이듭니다.
중간중간해설이나오는데큰도움이되고있습니다.
영화-‘사도’에서정조의역할로소지섭이나왔는데어울리지않는다고생각했었습니다.
한중록을읽으면서감독이왜소지섭에게정조역할을맡겼는지이해가되었습니다.
해경궁홍씨가첫아들의소를낳았으나죽고두번째아들(정조)을낳았을때
"인물이우뚝빛나시고골격이준수하니"라고표현하고있습니다.
소지섭이그런인물로는적격인것같습니다.
혜경궁홍씨가쓴어려운옛글을쉽게풀어써주신정병설님께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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