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어떻게 태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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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이야기

이성계 아버지(이자춘)가 고려 사람이면서 원나라의(지금의간도지역)의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고려 사람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 하자 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우를 달리 하기 위해서 차별 호적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주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이자춘(이성계아버지)등 고려인 관리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 한다. 이성계 아버지(이자춘)는 고려에게 협조 한다. 이성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이었다.

그 시절에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고,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인보다는 무인들이 대접 받는 시기였다. 이성계는 이자춘의 차남이었고 장남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물려 죽고 없었다.

이성계는 20살도 되기 전에 궁수로 이름을 날렸고 아버지와 함께 고려의 옛 땅이자 원의 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30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최영은 근위 부대를 맡았고, 이성계는 외곽의 부대를 맡았다.

여름이었는데 이성계에게 압록강을 넘어 외적을 물리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압록강을 넘으려 하자 여름이라 비가 많이 와서 압록강을 넘을 수 없게 된다. 이 때 이성계가 그 유명한 四不可論(사불가론)을 펼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는주장이었다.

그래도 우왕과 최영이 받아 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조민수와 논의 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 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 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 한다.

조민수와는 차기 왕을 옹립하는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 받게 한다. 창왕의 나이 아홉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듬해 창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만다. 이성계가 제 20대 왕 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3년 뒤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이성계의다섯째아들)등의 추대에 힘입어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 시킨다. 1392년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 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방원(나중에태종이된다)의 사주로 살해 된다.

이로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 을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등을 떠돌다 11년 후 인 1403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 된다.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수장 시키려고 방문을 써붙인다.

“왕씨 일가들에게 섬을 하나 내 줄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모략을 알아 차린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고 산 속에 숨어 자신들의 성씨를 全씨, 옥씨, 田씨, 龍씨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 했다. 태조 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성계는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여 서울에서는 성균관, 지방에서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고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등 억불 정책을 병행 한다.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는데 중국의 허락을 받는다. 왕후에게서 아들 6명이 있었는데 왕후가 죽고 젊은 왕후를 들인 후에 아들 둘을 낳는다.

이성계(태조)가 젊은 왕후를 사랑해서 젊은 왕후 둘째아들이 11살 때 세자로 만든다. 첫 부인 아들들이 ‘왕자의난’을 일으켜 두아들을 죽인다. 이성계는 왕자의 난을 겪고 나서 왕위를 내놓는다. 5째 아들인 방원이 주축이 되어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방원이 왕이 되지 않고 둘째 형이 왕(정종)이 된다. 그러나 실권은 방원이 쥐고 있었다. 정종의 왕후가 잠자리에서 왕자리를 내놓으라고 권한다.

왕을 내놓지 않으면 언젠가 는방원에게 살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함흥차사’란 이성계가 5째 아들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 주지 않고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겼다.

방원(태종)에 대한 태조(이성계)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74세로 사망한다. 정종(이성계의둘째아들방과) 물러나고 방원이 왕이되어 태종이 된다.태종의 아내는 태종보다 두 살 위인 민씨(원경왕후)였는데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되고나서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방원)은 정치는 잘 한 것 같다. 의정부를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육조장관으로 하고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 시키며 좌 우정승을 이조 병조에 이관 시킨다.

거북선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 실록부터이다. 신문고도 설치하고 태종5년에 경복궁이 준공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은 태종이 준공 시킨 거다. 태종실록은 9년간 계속 되었으며 덕흥사가 작업장이었다.

태종(이성계다섯째아들이방원)은 몸이 좋지 않아 40세도 안된 나이에 일찍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으로서 아들을 가르치고 싶어 했으나 첫째 아들 양녕이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고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자 14년 만에 폐위를 시키고 왕세자의 지위를 셋째 아들 충녕(세종)이 된다.

태종(이방원)은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등도 잘안다”면서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에 책봉 했다. 세종(방원의셋째아들)은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 되었다.

훈민정음을 보급,농업과 과학 개술의 발전,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국토 확장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세종 때에 개국 공신 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왕도 정치를 꿈 꿀 수 있었다.

4대 세종(충녕)은 당뇨가 있었고, 황희, 맹사성, 김종서, 박연등은 세종때 인물이다. 집현전은 고려때 설치 되었고, 세종때 확대 시켰다.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 되었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주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이들 관원 중에 연구에만 몸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관직에 이직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 또는 20년씩 머물도록 해주었다.

금속 화폐인 조선 통보를 주조한 이도 세종이다. 54세까지 살았으며 경기도 여주 영능에 세종(충녕)이 잠들어 있다.

p.s:’한권으로 읽는 조선 왕조실록(박영규씀)’을 읽고 있습니다. 한중록을 읽고 나서 조선 왕조 실록에는 사도세자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서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읽기 시작해 보니 이성계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저는 역사 는싫어 했습니다. 청년기에 접어 들며 삶이 너무 힘들어서 미래를 어떻게 살아 갈지도 모르는 판에 과거(역사)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수원 화성, 행궁, 융건능, 용주사를 자주 들락거리면서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조가 부모를 생각하는 고마움 도한 몫 했다고 생각 합니다. 이제 초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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