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이 폭군이 되는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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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폭군이되는과정

예종이 14개월이라는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자 세조비 윤씨(정희왕후.수렴청정을했었다)는 예종의 아들을 왕위에 올린게 아니라 20살에 자기의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세조의맏아들)의 둘째 아들(성종)을 그날로 왕위에 앉힌다.

13세인 어린나이로 성종(세조의맏아들의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정희왕후(세조비)가 수렴청정을 7년간하고 성종이 20세인 성인이 되어 섭정을 끝냈다.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살에 죽자 세조(성종의할아버지)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의 태조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퇴폐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 들었고 사회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 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 사건으로 비화 되고 말았다. 이 폐비윤씨 사건이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 알게 해준다. 성종은 38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능은 선능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인 줄 모르고 자란다. 폐비 윤씨(연산군의생모)는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로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공혜왕후가 17세에 자손이 없이 죽고 나서)왕비로 책봉 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 는일이 잦았다.

1477년 극약인 비상을 숨겼다가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 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 되었던 적이 있다. 1479년에는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 한다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연산군)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 했다.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 세상과의 접촉이 금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장차 왕이될 세자(연산군)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연산군)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터 였다.

성종(연산군아버지)이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폐비윤씨.연산군어머니)의 동정을 살펴 오라 하였다.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세자융(연산군)은 친어머니가 폐출 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불과 4살바기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연산군)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않았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융(연산군)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 정현왕후의 아들 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연산군)에게 응어리를 만들었다.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 융(연산군)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협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이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융(연산군)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연산군)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의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했던 무리는 단 한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19세 12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섭정은 받지 않았다.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였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있던 유자광,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사림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 할절호의 기회가 된것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여 들였으며 심지어는 어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등 폐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 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림세력 뿐 만아니라 연산군의 궁중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연산군은 대신들 뿐 만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아 절명캐 하는가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연산군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등의 언판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남김없이 처리해 버렸다.

성균관과 원각사를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홍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고,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 시켰는데 두 달뒤인 1506년 11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 을마감했다. 능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연산군지묘’라는 비석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1497년 연산군 은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를 개장하고1 504년에 성종의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숭했으며 묘도 희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 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p.s:세조(수양대군)도 단종과 엄청난 사람들을 죽였으나 정치는 제대로 한 인물이라 왕으로 인정을 해 주는것 같고, 연산군은 폭정으로 말미암아 왕으로 대접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림파

성종 대에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광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 하였다.

훈구파

기득권 세력인 훈구,척신 세력은 인척과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신진사림의 정계

진출을안팍으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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