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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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배경

명종이 후손이없이 죽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선조)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선조는 중종 의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 생덕흥군이 초의 셋째아들이다. 선조가 16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 주었다.

조선은 약200년 동안 부분적인 외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쟁을 치른적이 없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 전역은 불시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했다.

명종대에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자행한 학정의 잔재들을 정리하고 붕당정치의 기반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붕당정치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세력경쟁으로만 치닫고 있던 중이었다. 대부분의 양반계층은 붕당정치에 대한 참여만을 모색하고 있었고 국방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없는 상태였다.

붕당정치란: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이 붕당을 이루어 상호비판하고 견제하면서 행하던 정치로써 “붕당”이란 같은 또래 친구들의 무리를 말한다. 선조때인 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자리를 두고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양분되면서 시작되어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사색四色으로 갈리는등 조선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정치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하였으나 붕당 간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하면서 많은 폐해를 낳기도 하였다. (인터넷검색에서)

조선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키운다는 개념이 없었다. 일본은 국민을 하나 로뭉쳐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전쟁이었다.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부사 김성일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곳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 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준비를에 한창이라며 우리도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였고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형편없고 전쟁준비를 하는 걸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 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했다.

이 일로 동인 과서인이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 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해 4월 왜국 은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다. 1592년 4월 13일에는 부산포가 함락되고 보름 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 5월 2일에는 한성을 함락시켰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 남겨 놓은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 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다행히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 했지만 1598년 8월에 토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 은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지속된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복구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하지만 흉년으로 인해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마무리 짓지도 못한채   1608년 59 세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선조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으로 당시 사회는 명종시대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근본 원인은 조선 국내에서 찾기 보다는 일본의 국내 상황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막 끝내고 통일을 이룬 시기였지만 아직까지지방에는 제후세력들이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통일 을이 룬토요토미로서는 제후세력이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그들의 힘을 축소 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시대를 통해 획득한 전술적 능력을 외부로 표출하여 민심을 하나로 붂으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획책한 것이 중국 대륙 진출을 명분으로 한 조선 침략이었다.

다만 조선이 일본의 침략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당시 조선 조정의 한계성을 드러낸 것이다.선조는 흔히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명종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외척정치를 없앴으며 신권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이었다.명종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행위를 선조는 정치적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당파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 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던 당파중심의 신권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정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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