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장씨(장희빈)의 아들, 비운의 왕 경종

20151207_221815_e221c20c15c44562fc9ab643d1ed0aae.jpg

희빈장씨(장희빈)의 아들 비운의 왕 경종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 장씨 소생이다.숙종은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등 세 명의 왕비를 맞이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다 준 사람은 천비 소생의  두후궁이었다.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새숫물을떠받치는종)출신의 숙빈 최씨가 바로 그들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균(경종)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왕자금(영조)이었다. 그들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다.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여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숙종의 미움을 받아서 인으로 강등되어 폐출되었다가 숙종이 인현왕후를 페비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 복위 시킨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젊기 때문에 후궁(장희빈)의 아들 균을 원자 로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다가 사사된다.희빈 장씨는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가 왕자 균(경종)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중전까지 올랐던 희빈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 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다.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채 43세 일기로 사사된다.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장씨가 사사될 때 세자균(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줄 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일설에는 경종이 후사를 얻지 못한 것이 희빈 장씨 때문이라고 한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한다. 처음에 는거절하다가 인정에 끌려 그 녀의 청을 들어주게된다.

막상 세자(경종)을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희빈 장씨는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경종)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 당겨 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경종)은 그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그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종(영조의이복형)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 마져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세우는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영조의이복형)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영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두 달 뒤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영조)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 는말이었다.

반대가 거세었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생모(희빈장씨)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생모에 의해 생산능력을 상실한채로 어렵게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죽은 경종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경종은 1724년 8월 재위 4년 2개월만에 37세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능은 의릉으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gin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