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실패하고 돌아누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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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덜렁 혼자 있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못된다.

나처럼 할 일이 있어서 늘 내 방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집에 나 혼자라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저녁 7시면 아내는 운동하러 간다. 그때부터 9시까지는 혼자 집에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냥저냥 잘 넘어간다. 그러나 때로는 혼자 남아 있기 싫을 때도 있다.

어제가 그랬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내가 운동가는 것을 결석하게 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내가 하는 운동 30분 걸어오는 고스에 같이 가자고 꼬셔보았다. 잘 먹혀들어가지가 않는다.

이번에는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쇼핑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걷기 운동 갔다 와서 리버모 아웃렛 쇼핑센터에 가보자고 했다.

핵폭탄 같은 강력한 무기에 안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어느새 해가 길어져서 저녁 먹고도 한참 있어야 어두워진다.

날씨도 포근해져서 반팔셔스를 입고 다닌다. 차를 달려 아웃렛 쇼핑센터에 갔다.

수요일 저녁의 쇼핑센터는 고요하다.

주말에만 다녀봐서 쇼핑센터는 늘 사람들로 복작복작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주중에 그것도 밤에는 손님이 없다.

세일즈맨들도 한가하게 놀고 있다.

가로등 환한 불빛아래 천천히 걸었다. 영화촬영 세트장처럼 폭 좁은 길 양편에 유명한

명품상점들이 빼곡히 늘어선 길을 두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늙은 날의 데이트다.

쇼핑센터는 축구경기장 만큼 넓어서 한 바퀴 걸어오는 걸로 족하다.

들려야할 상점에 들어가 보지만 사고 싶은 물건도 없다. 갖고 싶은 물건도 없다.

누구를 사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돌아 나온다.그리고 우리 둘이서 웃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갖고 싶은 게 많더니 그 욕망이 다 어디로 가버렸나.

젊어서는 지지고 복고 싸우면서도 꼭 사야만 했던 것들이 지금은 시시하게 보이니 이게 웬 일인가.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이어야만 했는데, 이젠 그런 거 따지지 않고

헐렁해도 좋으니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나. 참으로 세월이란 기이한 존재다.

프릿처나 한 봉지 사 들고 먹으면서 걷는다. 아내가 말했다.

푸릿처는 굽기 전의 말랑말랑한 건빵 같다고.

늙다보니 건빵도 딱딱하고 빡빡한 것보다 녹진녹진해야 먹기에 편하다.

백화점 같은 상점을 몇 군데 드나들었으나 산 물건은 하나도 없다.

여름 폴로셔츠나 하나 만지작거렸다. 그것도 내가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수원에 있는

친구나 갖다 줄까 해서였다.

경험에 의하면 친구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기는 나나 마찬가지였다.

쇼핑센터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발길이 예전같이 즐겁지 아니하다.

마치 사랑에 실패하고 돌아누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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