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賢母良妻) 하면 우리는 신사임당을 꼽는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자식 교육을 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사임당이 훌륭한 교육자가 되기까지는 그 이면에 부친 신명화가 있다.
그리고 삼대에 와서 율곡 이이 선생이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있기까지는 훌륭하신 그의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를 올바르게 기르신 할아버지가 있다.
정명훈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저서 ‘너의 꿈을 펼쳐라’를 읽어보면
자신의 이념을 말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 나라와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 보겠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존경하는 친정아버님께서 평생 숙원 하시던 소망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을 따르며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이후 평생토록 제게는 커다란 숙제로 남아 항상 저를
쫓아다니며 재촉했습니다.”
그녀는 이화 여전 가사과에 들어가 가장 훌륭한 아내, 가장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이상적인 가정을 이룩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7남매를 키우며 그 아이들이 커서 내가 다 못한 애국 애족하는
삶을 계속 이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교육했다고 술회했다.
어머니 이원숙 여사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생후 6개월 된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고 수영을
가리키려 든다 해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수영선수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는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머니로부터 막내아들 정명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연년생인 형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는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명훈 이는 참 이상한 아이예요. 국어책을 읽으면 꼭
곡조를 붙여서 노래같이 읽지 뭐예요.” 나는 당장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명훈이에게 제대로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난 세상에서 화려한 피아노하고 초콜릿이 제일 좋아!“ 밥만 먹고 나면
피아노에 올라가 같은 곡조를 이렇게도 쳐보고 저렇게도 두드려보고
즐거워하는 양이 우리 아이 중에서도 그렇게 스스로 제가 좋아서 연습하는
애는 처음이었다. 어린애가 하도 열심이라 신기해서 하루는 선생님이
피아노 한 번 칠 때마다 바를 정(正)자를 그리라고 했더니 공책 몇
장에 걸쳐서 수도 없이 바를 정자를 빽빽하게 그려 놓는 것이었다.
또 개인지도가 끝나고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혼자서 연습하다가
선생님이 집에 도착하셨을 때쯤 전화를 걸어서 그날 배운 곡을
수화기에 대고 능숙하게 치는 등 신통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하루가 다르게 진도가 나가 놀랍게도 일곱 살에 하이든
콘체르트를 칠 수 있었다. 그 뒤로 아무리 유명해졌어도 그 애의
경력으로 일곱 살에 하이든 콘체르트를 졌다는 것은 빠지는 일이
없이 그의 타이틀이 되었다.>
이원숙 여사는 명훈이가 잠시 샛길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명훈이의 재능이 아까워 명훈이를 위해 거금을 주고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샀다. 이 일이 큰 자극이 되었는지 다시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5남매가 한국에 나가 연주회를 할 때였다.
경화의 어렸을 적 바이올린 선생님인 양해협 씨가 명훈이에게 지휘를
가르쳐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당장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지휘봉 5개를
사 주고는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명훈이를 뉴욕으로 데려와 음악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자 누나인 경화와
명화가 반대했다. 명훈이보다 잘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겠느냐고 했다. 더군다나 명훈이는 부끄럼을 잘 타고
남과 잘 사귀지도 못하는 데다, 감정도 풍부하지 않으니 음악은 맞지 안
는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집 아이 중에서 스스로 좋아서 피아노를 친
애는 명훈이 하나뿐이다. 공부는 아무 때라도 할 수 있지만, 음악은
시기를 놓치면 불가능하니, 지금 기회를 꼭 줘야만 했다.
명훈이는 연습벌레였다. 명훈이가 음악을 전공하기로 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 다른 애들이 모두 줄리아드를 나왔으니 명훈이도 당연히
그곳으로 가려니 했다. 그러나 뜻밖에 명훈이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마한 학교 매너스 스쿨에 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줄리아드에서
경쟁하기 싫다고 했다. 줄리아드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명훈이의 의견을 따랐다.
1974년 정명훈의 나이 20세 때이다.
구소련에서 벌어지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가볼 것을 권유했다.
주최 측에서는 세계에서 인정하는 음악가 두 사람의 추천장이 있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앙드레 프레빈’과 ‘피아티콜스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관한
자료들을 뒤져 모두 필사해다 주었다. 당시는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다.
공산권인 소련에 명훈이 혼자 가서 경선 기간 한 달을 지냈다.
결과는 2등이었다. 1등은 소련 사람에게 돌아갔다. 차이코프스키
공연이 끝난 뒤 소련 언론들은 청중들과의 대화를 하였던 유일한
연주자였다고 격찬했다.
정명훈은 매너스 스쿨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둘 다 전공했다.
본격적으로 지휘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줄리아드 대학원이 나을
듯했다. 이원숙 여사는 줄리아드 음대 총장 닥터 메논을 찾아갔다.
“흔히들 기악을 하다가 너도나도 지휘하겠다고 나서지요. 그런 경우
좋은 지휘자가 되기는 매우 힘듭니다. 지휘자는 정말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많아도 재주 있는 지휘자는 드물지요. 어머니께서 만약 명훈이가
피아노 쪽이나 지휘 쪽이나 똑같은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신다면
도전해 보시지요.”
지휘 공부를 할 학생 한 명을 뽑는데 50명이 지원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연습시키는 것이 시험 방법이었다.
그날 백여 명이 넘는 줄리아드 음대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아주 재미있어하며 명훈이의 지시에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재미있고 독특한 지도 방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줄리아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세계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인 줄리니를
만난 것은 정명훈이 18세 때 영국 런던에서다. 피아노 선생인 마리아
쿠르초의 소개로 무대 뒤에서 만났다. 줄리니의 첫인상은 베토벤 교향곡
7번 연주에서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는 강렬한 연주에 감복했던 일이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정명훈보다 단원들이 나이가 많아 힘들었다.
고독했지만 그래도 지휘대를 지킨 이유는 오케스트라의 매력 때문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 음악이 교향악이라고 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지만, 오케스트라는
완벽한 음악 표현이 가능하다. 베토벤과 브람스, 말러, 브루크너 등
위대한 작곡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정명훈은 말한다.
줄리니와의 인연이 그를 유럽에 진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방송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은 그의 업적
중에 하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를
지휘했다.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리’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상을 수상했다.
1990년 3월 17일 저녁 프랑스의 국립 바스티유오페라 개막공
연장에는 2천7백여 청중들의 감동 어린 기립박수 소리가 15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젊은 지휘자가 연출해낸 4시간 36분의 장엄한
드라마에 대한 갈채였다. 1989년 파리 자스티유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한 정명훈의 신축 오페라극장 개관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을 상연해 호평을 받은 것이다.
감독직을 수락하고, 1989년 5월 23일 정명훈은 파리 자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직을 맡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첫마디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를 ‘훈, 정’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제 이름은 ‘명훈, 정’입니다.” 그리고 단원들을 향해
“이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당신은 나에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나는
당신들에게 프랑스어로 말씀드리지요.”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정말 정명훈은 단원들에 불어로 말했다. 그리고 1990년 3월 19일
오프닝 콘서트에서 ‘트로이인’이 연주되는 역사적인 막이 올랐다.
공연은 대 성공이었고 정말 의미 있는 성공이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정명훈의 지휘 하에서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는
혼을 되찾았다’고 극찬했다.
정명훈은 무슨 곡이든 자기가 지휘하는 곡은 모두 외워서 연주한다.
그렇게 엄청난 노력파이다. 음악이라고 해서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전공으로 택한 사람이라면 뼈를 깎는 연습을 감수해야 한다.
한순간도 게을리 할 틈이 없다.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따스한 빛을 비추는 것”이 예술의 혼이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고, 자신의 격정에 휩쓸려 정신없이 지휘하는 모습.
머릿속에는 오직 자신의 음악 세계가 있을 뿐, 눈앞의 공간도 시간의
흐름도 의식 저 밖으로 까맣게 밀려나도 ‘소리’만이 그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높은 나무에 오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무를 흔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김수남
2016년 7월 16일 at 1:30 오전
네,정말 너무도 공감이 됩니다.마지막 말씀요.
“높은 나무에 오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무를 흔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담으신 뜻을 잘 알겠습니다.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