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들의 올림픽 경기 생중계방송을 TV를 통해 시청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내 기억 속에서 처음 들어본 올림픽 중계방송은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임택근 아나운서가 중계방송 하던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 후에 TV방송이 시작됐지만 TV가 집에는 없었고 가끔씩 다방에 들려
시청해 보는 정도였다.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부터는 미국 방송이 중계해 주는 경기만 시청이
가능 했기에 미국 경기만 보았다.
어쩌다가 미국과 한국이 맞붙는 경기가 벌어지면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경기를 보는 것 같았으나 미국 방송 렌즈를 통하고 나면 한국 선수가
실수할 때 오히려 신바람이 나는 거꾸로 된 중계자의 멘트에 나는 나대로
새겨들어야만 했다.
한 번도 시원하게 생중계되는 경기는 보지 못하고 가끔씩 녹화된 김빠진
경기나 시청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나마 녹화 방송도 미디어의 발달로 최근에 와서야 가능해 졌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녹화방송 경기는 보기는 보되 마치 경기를
분석하는 기분이다.
이래서 졌구나, 여기서 실패 했구나, 끝마무리를 잘 했구나, 하는 식이다.
늘 올림픽 경기 중계방송을 직접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게 나의 소망이었다.
이제 은퇴를 하고 올 여름은 더위를 무릅쓰고 한국에서 지내면서
한국 선수들이 싸우는 올림픽 경기를 만끽해 보고 있다.
내 편이 없는 스포츠는 보기는 보되 아무나 집어 먹는 맛보기 떡 같다.
녹화된 경기를 시청하는 것은 미지근하고 쓴맛만 남은 김빠진 맥주처럼
맛이 없다.
가장 재미있는 스포츠 경기는 내 편이 있을 때이다.
내편이 이기고 있는 경기보다 더 재미있는 시청 물은 없다.
더군다나 국가 간의 경기라면 이것은 금상첨화다.
미치도록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는 게 국가 간의 경기인데
그것도 금메달을 놓고 벌어지는 경기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단체전이나 구기경기의 긴박한 움직임은 마치 내가 같이 경기를
치루는 것 같은 박진감에 나도 모르게 땅을 치고 돌아 서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선수가 잘하면 괜히 신이 나서 아무나 붙들고 동질감을 나누고
싶어진다.
피지와의 일차 전 축구가 그랬다.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연속 골이 터지는데 7골을 넣어 8:1로 대승을
거두면서도 상대편에 대한 배려라든가 기분이 상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가혹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잔인한
관전이었다.
그렇게 두들겨 패고도 기분이 좋은 건 스포츠의 근본정신이
이런 건가 하는 의구심을 낳기도 한다.
피지와의 축구는 예도 아니다.
일본과의 여자 배구야말로 어찌 이기지 않고 배길 수 있는 경기라
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세트에서 지고 넘어갈 때 이거 뭐 이럴 수가 있나,
우리 선수들에 대한 원망이 목구멍에서 막 터져 나온다.
그리고 두 번째 세트에서부터 이기기 시작했는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냥 눌렀으면 하는 욕심이 지나쳐 일본 선수들이 계속해서 실수를
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솟구쳐났다.
세 세트를 연거푸 이겼으니 우리 선수들이 잘 해서 이긴 건 당연하다
하겠다.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는 건 선수들만이 아니라 나도 그랬다.
분해서 우는지 자책감에 괴로워서 우는지 눈물을 보이며 쓸쓸이
퇴장하는 일본 선수들을 보면서 통쾌감이 드는 건 왼 일인가?
한일전은 인간의 잔인한 근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면
부추기기까지 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인류애를 부르짖는 예수님도 스포츠 경기를 보실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적과 아군이 극명하게 가려진 개인 펜싱에서 칼을 겨누고 찌르는
우리 선수를 응원하면서 상대가 누구이던지 오랑캐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현상인가?
죽이고 죽는 잔인한 인간의 역사를 스포츠로 재연해 놓고 즐긴다는
것이 올바른 스포츠 정신일까?
올림픽에 많은 경기종목이 있지만 인기 종목은 살려두고 비인기
종목은 사라지는 지금과 같은 상업적 선정 방식이 올바른 선정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적이 아닌 경쟁만 있는 경기,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은
진정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