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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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이다. 나의건강은 우려했던 대로
지금까지 그렇게 좋지 않다고 할 수 있구나.
서울대 의대 정신건강 학회 이동영교수의 진단으로는
“루이체”치매라는 병이 가볍게 스쳐갔다는구나.
치매면 치매지 뭐 가볍게 쳤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의학용 수식이….
앞으로 나의 병이 어떻게 될지
진단할 수는 없다. 몇 개월… 몇 년이 될지…>

친구의 마지막 ‘이 메일’을 받은 게 3년 전의 일이다.
메일을 받고 한동안 착잡한 심정이었다.
치매라는 건 연속극에서나 보았지 내 주변에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막상 현실로 다가오고 나니 치매라는 병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보다 위대한 까닭은 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을 읽게 되면 동물만도 못하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동물에게는 치매가 없다.
개가 치매에 걸려 주인을 못 알아본다거나 똥인지 밥인지 구분 못하더란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치매는 인간에게만 걸리는 병인데 기본적으로 이성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가장 추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몹쓸 병인 것이다.
회신을 보냈으나 답신이 없는지도 오래다.
‘이 메일’을 받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평양을 넘나드는 전화 통화를 했었다.
통화를 하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우리들의 먼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먼 과거라니? 중학교 때 일들을 듣고 싶어 하다니 너도 참 늙었구나.“
“그래 난 늙었어, 너 기억나는 거 있는 대로 말해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도 긴요히 해야 할 말은 없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쓸데없는
잡담뿐이었으니 과거사 들려달라는 게 뭐 대단히 의심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둘은 죽 세가 맞아 모의 끝에 무전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산에서 날은 어둡고 잘 곳이 없어서 파출소 대기실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형사 분이 우리를 허술한 여인숙으로 데려가서 잠자리를 마련해 준일이 있었다.
“너 그때 그 일을 기억하니?” 기억한단다. 그리고 더 이야기 해 보라고 재촉이다.
마치 기억을 입력시켜야 기억이 존재하는 사이보그 인물처럼 졸라댄다.
경주에서 박물관 에밀레종 앞에서 설명 듣던 일은?
포석정에 갔더니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쓸쓸한 풍경도, 지도도 없이 서빙고를
찾아가던 일들, 그리고 석굴암에서 직접 석불을 만져보면서 천년 묶은 공기를
호흡하던 일들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았다. 다 기억한단다.
그때 울고 싶도록 배고팠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둘이는 실컷 웃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언제인가는 꼭 만나보고 싶었던 친구 일순위에 올라있던 그를 만났다.
열아홉에 헤어지고 그 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닿아 메일이 오고가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고,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던 인포메이션은 수정해 가면서 사진도 나눠
보고 했다.
그럴수록 더욱 보고 싶었다.
나는 멀리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아무 때나 전화해서 만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지난 세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는 다른 친구를 통해서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들보다 더 바쁜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선뜻 내 시간에 맞춰
불러내기에는 마음이 안 내켰다.
그보다는 솔직히 말하면 그에 비해서 떳떳해 보일만하지 못해서 미루고 살았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 쓸데없이 만난다음에 기가 죽어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가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제 정년퇴직하고 집에 있다니 만나도 될 것 같았다.
마침 내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화정동에 살고 있다기에 한가한 백석전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다릴 요량으로 조금 일찍 전철역으로 나갔다.
층계를 내려가 한번 둘러보는데 내 앞에 친구가 와서 서 있다.
이름도 못 불러보고 손부터 잡고 얼굴만 바라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십년도 더 넘게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었는데도 보는 순간 첫눈에 내가 그리던
친구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없던 안경이 끼워져 있고 좀 늙어 보일뿐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며 얌전한 태도도 옛날 그대로였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하나도 틀린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자 마자 좋아지는 마음’ 이건 어디서 오는 걸까.
어려서 물든 정은 긴 공백 기간을 거처도 변함이 없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친구와 같이 덕수궁엘 갔다.
덕수궁은 간단하게 데이트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고, 분위기 한적한 고궁에다가, 미술관은 늘 새로운
전시회를 하고 있으니 언제 들려도 미술 감상의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같이 고궁을 걸으면서 동심으로 돌아가 비계산적인 대화에 웃음꽃을 피웠다.
정에는 유통기간이 없어서 아무리 오랜 후에 만나도 그저 똑 같은 정일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침 고궁 안에 ‘돌담길’이라는 찻집이 오프닝 세레모니를 하고 있었다.
떡을 한 상 차려놓고 사물놀이패며 국악연주가 우리의 만남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테이프 끈은 찻집에 들려 쌍화차를 마셨다.

그 다음해 겨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젊은 날을 다 보냈다. 한국에서의 생활풍습은 잘 모른다.
아내와 함께 머무는 한국에서의 생활은 매사 엇박자만 일으킨다.
우리부부는 미국식으로 나의 친구는 아내도 같이 알고 있어야 하고,
아내 친구 역시 내가 다 알고 사는 게 당연한 줄로만 믿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한국에 나왔으니 내 친구를 소개해 주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친구와 부부동반 저녁 약속을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친구는 아내 없이 혼자였다.
아내는 선약이 있어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예약이 파토가나고만 것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는 남자들 끼리 밖에서 만나고 만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그리고도 지금까지 그의 아내는 영영 보지 못했다.

‘이 메일’을 보냈는데도 친구는 열어보지 않는다.
작년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신호만 울릴 뿐 받지 않는다.
불길한 느낌이 스친다.
그 친구 병세가 깊어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영원히 헤어지기 전에 한번은 만나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옛날 같으면 편지 겉봉에 주소가 적혀있어서 찾아가면 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성냥 곽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은 아파트구멍으로 사라져 들어가면
그만이다.
세상은 비교가 안 되리만치 발전했는가 하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도 발달해 있다.
거처도 모르면서 소통을 하다 보니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해가 바뀌면서 조금은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이번 한국에 나온 김에 만나보지 않으면 영영 못 볼 것만 같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전화를 받는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너 지금 내 전화 받을 수 있어?”
받을 수 있단다.
“우리 나이면 청춘인데 너 뭐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한다.
“그러면 한번 만나야지, 전철 탈 수 있니?” 그건 안 된단다.
“그러면 화정역에 커피숍이 있으니 그리로 나올 수는 있지?“ 나올 수 있단다.
아무래도 오전이어야 그나마 정신이 맑을 것 같아서 내일 오전 11시 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내일은 주일이 돼서 성당에 가야 한단다.
그러면 오후나 월요일 아무 때나 시간은 네가 정해서 알려달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걸었다. 전화를 받는다. “야, 반갑다. 만나자는 시간은 정했니?”
수화기에서는 그래 지금 만나던지 내일 만나던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가 자신 없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여자 목소리도 겹쳐 들리면서 의논을 하는
건지, 옥신각신 하는 건지 조금은 소란하다.
미국 같으면 친구와 친구부인은 당연히 한 사람이어서 다 같이 알고 지내지만
한국에서는 친구만 알았지 부인은 모르는 사람이다.
눈치가 이상해서 네가 결정한 다음에 알려달라고 하고 끊었다.
그리고 그 후로 전화는 없다. 걸어도 받지 않는다. 영영 받지 않는다.
치매증상은 누구보다도 곁에 있는 아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호하는 아내의 결정이 곧 그의 결정이다.
창밖을 내다본다. 맑은 허공에서 쏘다지는 겨울햇살이 눈부시다.
햇살은 차가운 공기를 뚫고 다가와 뺨에 닿는다.
친구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나부낀다.
헤어지는 인사라도 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도 전화번호를 누른다.
주인 잃은 전화기는 울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
그리고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기쁜 소식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e-mail을 보냈다.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보냈다. 그 중에서 메일 하나가 반송되었다.
<받는 이의 메일주소가 존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휴면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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