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의 삽살개 이야기 – 일산동구 식사동(食寺洞)
공양왕(1345-1394)은 고려의 마지막 왕이다.
고려 말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에 의해 왕위 자리를 빼앗긴 공양왕은
이성계 무리를 피해 가족과 아끼던 삽살개를 데리고 고양 견달산의 한 절로
숨어들었다.
이 절의 스님은 왕을 보더니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하며 공양왕과 가족을 절에 머물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계 무리가 이 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스님은 왕과 가족을 견달산의 암자로 피신시켰다.
왕은 개는 체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절에 남겨두었다.
암자에 갇혀 있던 공양왕과 가족은 얼마 못 가서 관원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는데
이들을 압송하러 온 관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래전 궁에 갔을 때 보았던 삽살개가 절에 있는 걸 보고 눈치를 챘지”
압송되는 공양왕을 보자 삽살개가 달려들어 꼬리를 부비다가 스스로 연못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일산불교병원이 있는 식사동(食寺洞)은 왕에게 밥을 날라주던
절 이름을 마을 이름으로 삼은 곳이다.
마지막 왕의 한과 비통함이 서려 있는 공양왕릉 고릉의 봉분 앞에는 왕의 압송을
슬퍼하며 목숨을 버린 삽살개의 석상이 남아 있다.
또 다른 설화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를 찾아 왕위를 맡겼다.
마흔 다섯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평생 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풍족했고 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왜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2년 8개월 만에 고려가 아닌 조선의 왕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게 된다.
공양왕은 이성계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을 예감하고
밤을 틈타 송도개성의 궁궐을 탈출해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갔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방이 캄캄해졌을 때 산 저쪽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어슴푸레한 그곳을 살펴보니 절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한 스님이 나와 물끄러미 왕의 행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찌하여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하지만 쫒기는 임금을 숨겨 주었다가는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어 스님은 공양왕에게
“저희 절은 위험하니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한 누각에 가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고
공양왕은 그 누각으로 가 절(寺)에서 날라다주는 음식(食)으로 연명하였다.
이로 인해 식사리(食寺里)의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의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 후 왕이 평소에 귀여워하던 삽살개가 어느 연못 앞에서 자꾸 짖다가
돌연 물속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못의 물을 퍼내어 보니 옥새를 품은 왕이 왕비와 함께
죽어 있었다.
비통에 잠긴 친족들은 연못 뒤에 조그마한 봉분을 만들어 왕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 후 이곳은 왕릉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왕릉에는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개모양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죽음으로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린 충견 삽살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같은 내용이 두 개의 다른 설화로 전해 온다.
공통점을 찾아보면 삽살개가 자살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개가 자살할 수 있을까?
개의 석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설화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