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갔던 길 오늘 또 걷는다.
道家에서 道는 自然이라 했다. 길은 자연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자연은 ‘自 스스로 자’ ‘然 그러할 연’으로
자연은 스스로 그렇다는 말이다.
길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길은 道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말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즐겨 쓰시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생각난다.
대도만 문이 없는 게 아니라 오솔길도 문은 없다.
문 없는 길은 이미 존재해 있고 나는 그중에 길 하나를 선택해서 걷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평평한 대로를 걷고, 어떤 이는 산길을 선택해서 고행을 자처한
사람도 있다.
나는 오솔길을 택했다. 한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오솔길 말이다.
길은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어느 구간을 걷고 있을 뿐이다.
다행인 것은 길이 평화롭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걸은 사람들은 수난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나의 길 걷기가 끝나는 날, 누군가는 내 앞에서 이어 걸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길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청평지를 한 바퀴 돌아, 왔던 길을 다시 걷는다.
중국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1471-1528)은 이렇게 말했다.
“선지후행(先知後行), 내가 알고 걷는 것도 아니고, 걸은 다음에 아는 것도
아니다.
걸으면서 아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칸트가 한 말과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걷다보면 눈에 들어오게 되고, 느끼게 되고, 알게 된다.
인생도 그렇고 하다못해 운동 길도 그렇다.
걷다보니 별걸 다 알게 된다.
가끔씩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남녀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그러한 순간이
있음으로써 옷깃을 다듬고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것이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 어떻게 대답해 주느냐에 따라서 다음 결정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조물주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셨다.
날씨 덥던 날 그 많던 매미는 다 어디로 갔나?
죽었다면 시체라도 있어야할 게 아닌가?
빈둥빈둥 놀고먹는 팔자는 아무도 모르게 시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