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한국 가는 비행기가 늘 만석이다.
13시간 비행에 기왕이면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일찌감치 공항에 나갔다.
통로 쪽 좌석은 다 나가고 없단다. 애석했지만 별수 없이 창가 석으로 정했다.
내 옆에는 육십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앉는다.
남편이 가운데 앉고 통로 쪽에 부인이 앉았다.
체구가 작은 부인이 가운데 앉았으면 좋으련만 덩치 큰 남편이 앉는 바람에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자니 어깨가 부디 친다. 좁은 공간에 갇혀 꼼짝없이 고생 좀 하게 생겼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얼마 안 돼서 스튜어디스가 오더니 두 부부에게 행복한 부탁을 한다.
비즈니스 석으로 옮겨 주겠다고 했다.
부부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신이 나서 스튜어디스를 따라간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코노미 석은 만석이고 비즈니스석이 비어 있을 때 단골손님을
선정해서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공짜 표로 탔으니 해당될 리가 없다.
그 통에 나는 혼자서 좌석 세 개를 독차지하게 생겼다.
그렇다고 당장 아무도 못 안게 막을 수는 없다.
기회를 보다가 불이 꺼지면 슬며시 누워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기회는 호락호락 오지 않는다.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던 어떤 늙은이가 떡하니 통로 쪽 자리에 와서 않는다.
다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을 늙은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행색이며 하는 행동이 들 떨어진 짓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겉으로 보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겉모습이 그 사람의
속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기 마련이다.
칠십은 넘어 보이는 바짝 마른 체구에 청바지를 입고 흰 양말에 검정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신었다. 낡아빠진 검은 잠바 차림에 챔피언 로고가 붙은 야구
모자를 쓰고 있다. 가끔 모자를 벗으면 염색 시기를 놓쳐버려 흰머리와 검은 머리 선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행색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식사시간에 매너도 영 마음에 안 든다.
커피를 받아 놓고 설탕을 두 봉지 타서 넣더니 그것도 모자라는지 설탕을 더 달라고
스튜어디스를 부른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눈에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다.
한 자리 건너 앉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꺼지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팔 얹어놓는 칸막이를 세우더니 떡하니 발을
내 쪽으로 들여 밀면서 아예 누워버린다.
참으로 염치없는 늙은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지 이것도 내 운명인 것을 그냥 눈 감고 있기로 했다.
비행기는 알래스카를 지나 베링 해로 접어들고 있었다.
멀리 운해 넘어 태양이 보였다. 한국 시각은 오전 11시 58분이다.
한국에서 보면 태양은 대낮 그대로인데 지구 끝자락에서 보면 온종일 석양이다.
태양은 그 자리 그대로이지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대낮도 되고 석양도 된다.
과학의 발달로 지구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구석구석 박혀있던 쓸모없는 섬까지
차지하려 쌈박질을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에게 분명 혜택으로 다가왔지만, 인간을 야박하게도 만들었다.
인천공항에 거의 다 왔다고 안내방송을 한다.
식사 후, 유니세프 헌금에 동참할 사람에게는 봉투를 나눠준다.
쓰다 남은 동전이 있으면 넣어 달라는 부탁이다.
옆 좌석 늙은이가 지나가버린 스튜어디스를 다시 불러 자청해서 봉투를 달라고 한다.
무엇을 어찌하려고 저러나 지켜보았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더니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봉투에 넣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백 불이면 내게는 큰돈이다.
왜 내게만 큰돈이겠는가, 분명 저 사람에게도 큰돈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우습게 보이던 늙은이가 돌연 달리 보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실천하는 노인이 위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