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서민이어서 그랬는지 설날 떡만둣국을 먹는 것으로 그만 이었다.
그리고 식혜와 수정과 정도였다.
아마 좀 잘사는 집에서는 시루떡에 찰떡 그리고 약과와 강정, 다식까지 골고루
갖추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옛날 진사 댁에서는 대가족이 먹어야 하니까 많은 음식을 만들면서 시루떡에
찰떡까지 골고루 차렸을 것이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북한에서 명절음식 소개로 그들이 적대시하는
양반집 음식을 소개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북조선을 떠받드는 재미동포 기간지에 소개된 설 명절 음식이 이채로워 소개한다.
떡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명절음식으로 의례히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을 풍습으로
여겨왔다.
설날의 떡으로서는 시루떡, 찰떡을 제일로 꼽아왔다.
시루떡은 설날에 만들어 먹은 떡의 하나였다.
일명 설기떡이라고도 불리운 시루떡은 흰쌀 또는 찹쌀가루를 시루에 펴고
삶은 팥을 안쳐 쪄서 만들었다. 설날에 만드는 시루떡은 대체로 팥이나 콩고물을
놓아 찐 다음 채친 무우나 호박, 오가리를 넣어 맛을 돋구었다.
설명절의 시루떡 가운데서 특히 이채를 띠는 것은 찹쌀가루에 검정콩, 대추, 밤,
꿀, 계피가루 등을 버무려서 찐 소머리떡이었다.
개성지방에서는 설날 아침 소머리떡을 시루에 담은 채로 사돈집에 설음식으로
보내는 것을 풍습으로 여겼다
설명절떡 가운데서 누구나 즐겨먹은 것은 찰떡이었다.
설명절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흰찹쌀, 차조, 찰기장 등 찰기있는 낟알을 시루에 쪄
떡돌 위에 놓고 떡메로 친 다음 여러가지 고물을 묻힌 찰떡을 만들었다.
찰떡으로서는 황해도 연백(연안, 배천)지방의 찰떡이 유명하였다.
예로부터 이 고장의 쌀은 전국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목화, 누에고치와
함께 《삼백(세 가지 흰 것)》으로 불리웠다.
콩고물을 묻힌 찰떡은 기름기가 찰찰 돌고 맛이 좋아 사람들의 구미를 한층
돋구어주었다.
설명절날에 마신 도소주
설 명절을 맞으며 마시는 술을 일명 《세주》라고 하였다.
세주는 전해의 가을에 거두어들인 낟알 가운데서 잘 여문 것으로 미리 빚어두었다가
설날아침 돌아간 조상들에게 먼저 부어 올리고나서 집안과 마을의 웃어른들과
세배하러 온 손님들에게 대접하였다.
이때 세주로 마셔온 술은 지방과 가정에 따라 여러 가지였다.
일반적으로는 소주나 청주를 마셨으며 특별히 담근 술로서 도소주를 마시기도 하였다.
도소주는 오랜 옛날부터 전하여오는 술로서 육계(육계나무껍질), 산초(산초나무열매),
흰삽주뿌리, 도라지, 방풍(다년생풀의 하나) 등 고려약재를 술에 담그어 우려낸
고려약술이었다.
예로부터 설날아침 이 도소주를 한 잔씩 마셔야 그 해에 앓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일러왔다.
설날의 음주관습과 관련하여서는 예로부터 유다른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우선 설술은 《세주불온》이라 하여 술을 덥히지 않고 찬 대로 그냥 마셨다.
여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정초부터 봄이 든다고 보았기 때문에 봄을 맞으며
농사준비를 해야 하므로 이날에 지나친 과음을 피하고 농사일에 착수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관념이 담겨져 있었다.
그밖에 지나친 과음으로 명절분위기를 흐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도덕관념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설술은 나이어린 사람부터 먼저 마시고 나이 많은 늙은이는 나중에
마셨다.
일반적으로 술은 아랫사람이 웃사람에게 붓고 웃사람부터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주방식도 설날만은 예외로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젊은 사람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므로
그것을 축하하는 표시로 먼저 술을 마시게 하고 늙은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쉬워서 나중에 마시게 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설날아침 늙은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어린이들로부터 세배를 받은 다음 흔히 강정을
답례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