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베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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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과를 깎다가 왼손 가운데 손가락 끝자락을 베고 말았다.
지혈 시키려고 꾹 누르고 한참 기다렸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밴디지를 찾느라고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 봤어도 밴디지 비슷한 것도 없다.
임시로 스카치테이프로 감아놨더니 붉은 피가 뭍어나면서 뭐 대단한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인다.
월그린에 들러 밴디지를 샀다. 피가 묻어 볼품없는 스카치테이프를 갈아치웠다.

아침에 면도를 하려니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왼손에 물이 닿지 않게 하면서 오른손으로만 면도하기는 처음 해 보는 일이다.
불편은 샤워로 이어지면서 극에 달한다.
왼팔을 만세 부르듯 쳐들고 오른 손으로만 머리를 감는 것도 그렇고,
샴푸를 덜어 머리에 뒤범벅으로 섞는 것도 어색하기 이를 대 없다.
한 손으로 코 풀기는 더욱 어렵다.

그나마 왼 손이이기에 다행이지 오른손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 하나만 쓰면서 사는 게 이렇게 불편한지 몰랐다.
손을 두 개나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뜻을 알 것도 같아서 감사드렸다.
어쩌면 하나면 될 것과 둘이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만들어주셨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처가 아무는데 열흘은 족히 걸렸다. 상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낳지 않는다.
감싸주고, 보살펴 주고,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해 주는 이런 애틋한 사랑을
누구에게 베풀어준 적 있더냐.
누구를 위한 사랑이 이만큼 철저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생각나는 게 없다.
내 몸 아끼듯 그렇게 사랑해 줘 본일 있었으면 얼마나 바람직한 삶이었겠는가.
<열애>                                        신달자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흘러 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 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 많아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티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뒤치락 뒹굴겠다
연인 몫을 하겠다
입술을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 나겠다
<열애 전문>

시인은 상처와 열애를 벌리고 있다.
열애가 무엇이냐? 사랑싸움이 아니더냐.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랑하는 연인들이 늘 상 벌리는
티격태격 열애의 패턴이다.
손을 베인 ‘상처’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렸다”
평생을 그렇게 산다. 티격태격 열애의 패턴으로 그렇게 산다.

아침에 사과 깎다가 가운데 손가락 끝자락을 베고 만 것이 그냥 상처인
줄만 알았지 누가 심오한 의미를 일깨워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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