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쯤 머리 깎으러 종로3가로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아침을 잔뜩 먹었다.
배가 부르면 밖에서 음식을 봐도 먹고 싶은 생각이 덜 나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칼국수를 끓여 먹기로 마음먹었다.
전철을 종로까지 타고 갈까 하다가 안국동에서 내렸다. 6번 출구로 나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인사동 길을 걸어가면서 먹는 집만 눈에 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개성 만둣집이 있고, 그 옆으로 수제비집이 있고
조 밑에는 잔치국수가 있다.
나가질 말아야지 막상 나가서 보면 먹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참다못해 간단한 잔치국수로 요기나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낙원동 지하시장으로 내려갔다.
가장 저렴한 잔치국수 2천 원짜리를 시켰다.
즉석에서 국수를 삶느라고 조금 시간이 걸린다.
국수를 너무 많이 줘서 요기가 아니라 끼니가 되고 말았다.
팔십이 다 돼 보이는 할머니에게 국수 값 2천 원에 팁으로 천원을 더 드렸다.
할머니는 온종일 기분이 좋으실 거다.
돈 많이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맛은 있으되 기분은 상쾌하지 못하다.
싼 걸 먹으면 맛은 덜하되 기분은 좋다.
아꼈다고 그것이 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갖고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껴야 기분이 좋고 기분이 좋으면 엔돌핀이 나온다.
늘 다니던 이발소에 갔다. 허름해서 그런지 허름한 손님들만 북적인다.
어느덧 종로 3가 싸구려 이발소가 단골이 되고 말았다.
처음 들어가기가 껄끄러워서 그렇지 한번 겪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쉽게 드나들기 마련이다.
전쟁 때처럼 기계충을 옮기는 것도 아닌데 망설일게 무어냐?
나이도 들 만큼 든 이발사들이 닳고 닳은 기술인데 믿고 맡기는 거다.
머리 깎는데 3천 5백 원에 염색하는데 5천 원이다.
이번에도 머리 깎고 염색한 다음 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그냥 킵하라고 했다.
한국에는 팁 문화가 없는데 팁을 받았다면 얼마나 기분 좋겠는가?
이발소를 나오면서 김 장로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들이 UC버클리에 입학해서 신학 공부를 하겠다는데 자신이 장로이면서도
신학 공부만은 말려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고 했다.
아들이 말린다고 물러설 리도 없고 결국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선교하겠다며 인도로 갔다.
일 년이 넘었는데 제대로 먹기나 하는지 걱정이 돼서 아들을 방문했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각기 다른 종교에서 스피커를 통해 아침 방송을 제각각 하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란다. 길에는 웬 걸인들이 그리 많은지 걸어가면 여기저기서
손을 내민다. 보기에 하도 딱해서 1달러씩 줬다.
아들이 보고 화를 내더란다. 그렇게 많이 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25센트만 주라고 신신당부하는데도, 안 주면 말았지 차마 25센트만 줄 수는 없더란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화장실이었다.
엉성한 것은 그런대로 참겠는데 화장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손으로 닦고 난 다음 물로 손을 씻으라는데 이거야말로 도저히 따를 수가 없더란다.
이 중에서 25센트를 받은 걸인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살다보면 기분 좋은 일도 있고 기분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기분 나쁜 일은 입 다물고 피하던지 눈감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은 계속 일어나면 더 좋은 것이다.
오는 길에 서순라길을 걸었다. 지난겨울 아기자기하던 상점들은 다 문을 닫고 없다.
그럴 줄 알았다. 그저 무턱대고 가게를 열면 되는 줄 알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팔목시계만 파는 가게가 새로 생겼다. 들어가 훑어보다가 카지오 시계가 얼마냐고 물었다.
중년 아주머니, 내가 돈이 있어 보이는지 삼만 원이라고 한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원이면 적당할 것 같다.
돌아 나와 잠시 걸었더니 규모가 조금 작은 디지털시계 가게가 또 있다.
같은 시계를 물어 봤다. 2만 2천원이란다. 잠시 머리를 굴려 봤다.
다음에 와서 살까도 생각해 봤지만, 장사도 안 되는 가게를 열어놓고 있는 꼴이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 들었다.
보나마나 다음에 오면 이 가게는 문을 닫고 그만뒀을 것이다.
그냥 사기로 했다. 2만 원에 달라고 했다. 그러란다.
국수집 할머니하고 늙은 이발사에게 팁 준거 여기서 다 만회했다.
기분 좋은 건 계속 이어지면 더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