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지는 약’은 커피처럼 즐기면서 마신다.
‘죽고 싶어지는 약’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약을 복용한 첫날은 어떻고, 둘째 날은, 셋째 날은 그리고 마지막 날은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하도록 미치겠는 날.
그런 약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왜 ‘죽고 싶어지는 약’의 발명을 고대하는가 하면,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너나없이 100세를 살게 되면 그때는 이런 약이 대박을 칠 것 같아서다.
불치병 같은 시한부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약이 있어야할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은 좋다는 건 다 먹고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친다.
장수가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TV에서 보여주고 선량한 노인들을 부추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고받은 환자도 더 살고 싶어 애걸복걸한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지 발버둥 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문제는 살고 싶은 마음이 강열해서 그럴 것이다.
말기치료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의사만 아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까발려진 세상에 환자와 가족들도 다 안다. 그러면서도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고통 속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죽기 싫어한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고 싶은 마음은 ‘쪼끔‘에 불과하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다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연수명을 전제로 하셨지 과학이 수명에 기여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이 수명을 연장하기 전에 죽는 약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죽기는 싫어하고
더 살겠다고만 하는 게 문제다.
‘죽고 싶어지는 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기치료를 계속하면 삶의 질이 떨어져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엉망인 삶일지라도 일이년 더 살아보겠다고 무서운 치료를
선택하고 만다.
살만큼 산 노인이 병상에 누워 몇 년째 지내면서 아직도 더 살아야겠다고 삶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죽고 싶어지는 약’을 복용한다면 얼마나 멋진 마무리가 되겠는가?
얼마나 멋진 삶의 본보기가 되겠는가?
누구나 소원하기를 죽을 때 자는 듯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그런 좋은 바람은 아무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다.
말로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은 앞날을 알 수 있을 때 ‘죽고 싶어지는 약’을 복용함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죽고 싶어지는 약’을 먹고 나서, 그래가지고 자살하라고?
자살이라고 말하면 자살이고, 존엄사라고 말하면 존엄사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