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은 겨울답지 않은 고온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여름 같은 날씨에 강우량도 적어서 예년 평균 강우량에도 못 미치는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산불로 피해가 많이 발생한 것도 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 때문이다.
오후에 운동길에 나서면서 반바지에 러닝셔츠만 입었다.
아직도 2월인데 혹시 내가 유별스럽게 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만 걸어도 더운 날씨여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웬 걸 공원에 나가보니 모두 반바지다. 블루진을 입었다면 사달이 날 뻔했다.
살을 다 내놨는데도 더워서 땀이 난다.
미국에서 살다 보니 다 잊어서 그렇지 내가 한국에서 살 때는 가리는 게 많았다.
이사할 때도 날을 잡아서 가야 했고, 초하루 보름 정화수를 떠 놓고 비는 집도 많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걸 다 미신이라고 하지만 딱히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정신세계에 잠재해있는 것이 수천 년 이어 내려온 우리의 전통
무속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부정 탄다는 말을 한다. 부정(不淨)과 유사한 말로 살(煞)이 끼었다는 말도 한다.
부정이 오염(汚染)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결함과 대립한다.
거름이나 두엄이 부정하고 배설물이 부정인 것처럼 죽음이 부정인 까닭도
시신의 썩음과 무관하지 않다.
부정을 탄다는 말은 좋지 않은 것들이 서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부정을 막기 위해 일련의 행위를 금기하게 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부정과 금기는 서로 깊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아기를 나면 금줄을 치고 삼칠일(21일), 백일(100일), 돌(1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에 금기가 집중된 것은 부정의 요인으로 매우 강조된 면모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무속 신앙에서 동티라는 것이 있는데 한자로 동토(動土)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동티 날려구?” 하는 말은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거리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예로부터 동티를 예방하기 위해, 그날의 일진을 잘 살펴서 손(損)이 없는 날을 택한다.
묘를 쓰거나 이장할 때, 집을 수리할 때에는 먼저 산신이나 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도
동티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다.
동티는 고목을 베고 난 다음 만날 수도 있고, 흙일하고 나서 만날 수도 있다.
내가 왜 이런 뜨악한 이야기를 느닷없이 꺼내는가 하면 아무리 미국에서 산다고 해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하는 이야기이다.
불과 2주 전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와이프가 죽었단다. 깜짝 놀랐다.
그동안 당뇨가 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죽을 만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다.
당장 작년까지 일했으니 건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들어보지도 못했던 당뇨 코마에 빠졌다고 했다.
저혈당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랬다가 다시 깨어났다.
여기서 내가 의심스러운 것은 그 친구가 재작년에 새로 지은 집을 사서 이사했다.
새집으로 이사하고 난 다음 동티가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옛말에 새집 짓고 또는 이사하고 나서 3년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 것은
생각이 너무 비약했나?
2년 전에 미국에서 잘 살던 처제가 갑자기 폐암 진단을 받고 금세 죽었다.
평생 담배를 피운 것도 아니고 폐를 해칠만한 노동일을 한 것도 아니어서 원인으로
이것저것 들춰봤으나 딱히 이것이다 할 만한 합당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고 3년을 못 채우고 발생한 일이다.
그때도 동티난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은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지는 불과 150년이고
그 이전 4,800년은 기독교 없이 살았다.
우리 조상들이 믿고 살았던 전통 무속 신앙이 모두 허구라고 단정하면서
조상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전통 신앙 중의 하나인 동티 같은 민속 신앙으로 볼 때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티가 무섭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이다.
동티에 과학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할 말이 없다.
마치 정이 깊은 지, 안 깊은지를 잣대로 잴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