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여행이 주는 행복, 고민, 낭만,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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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머리가 석양을 향한다. 태평양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간다. 아름답고 신선한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등지고 금문교를 빠져나온다.
선상에 나와 멀어지는 샌프란시스코 마천루를 바라본다.
붉은 잣대를 가로지른 듯 점과 점을 이어놓은 금문교가 더없이 길고 아름답다.

유니버셜 라운지에서 비상탈출 예행연습을 한다고 모였다.
모여든 승객 거의 다가 노인이다. 어쩌면 젊은 사람은 드문드문 있는지!
칠십도 중반인 내가 젊은 편에 속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승객이 거의 다다.
흑인이 한 쌍 있고 동양인으로는 중국인이 여러 명 구릅으로 온 모양이다.
그리고 모두 백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온통 노인 천국이다.
살아오면서 크루즈를 열 번도 더 타 봤지만 이렇게 노인들만 득실거리는 크루즈는 처음 봤다.
주로 성수기에 타 봐서 젊은 층이 대다수였는데 비수기인 3월이어서 젊은이는 일하러 가고
은퇴한 늙은 사람들만 할 일 없이 크루즈를 즐기나 보다.
노인들과 함께 여행하자니 속은 편하다. 노인들은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친절하고 유순하다. 내 나라 사람처럼 허물없이 대해도 다 이해하고 받아준다.
젊은이들처럼 대꾸하기 싫다는 표정은 짓지 않는다.

배는 안방처럼 편안하다.
나처럼 뱃멀미가 심한 사람도 크루즈는 괜찮으니 이것도 희한하다.
객실 온도를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다. 떨머스타터가 있기는 해서 온도를 올려놔도,
내려놔도 매한가지 쾌적한 온도만 유지된다.
호텔 방보다 편안해서 잠을 푹 잤다.

14층 뱃머리에 위치한 뷔페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테이블에 앉아 선미를 바라본다.
6시 30분에 해가 뜬다고 했는데 지평선 넘어 붉은빛이 구름에 가려 얼굴을 내밀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선미는 조용하기가 눈 온 날 밤처럼 고요하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이 없어 더욱 그러하다.
크루즈 말미는 동력을 일으키는 프로펠러가 뒤집어 놓는 바닷물 거품이 맥주를 부어놓은 듯
물거품을 일으키며 용의 꼬리처럼 길게 이어진다. 꼬리만 길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거대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바닷물을 뒤집어 놓아 일어나는 거품과 함께 바다 냄새도
풍긴다. 비리지도 않고 짜지도 않은 신선하고 상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크루즈의 백미는 혀끝을 자극하는 먹거리의 향연이다. 온 세상 맛있다는 음식은 모두
차려놓고 마음껏 먹어보라는 먹세귀신의 놀이터처럼 가혹하게 유혹한다.
달콤하고 쥬시하고 입안에서 녹아날 것 같은 감미로움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식탐을 시험당하는 전쟁터에서 전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심히 괴롭다.
입이 즐거워하는 만큼 위는 고달프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아는 사람들은 개인 물병이나 마호병을 가지고 와서 식탁 테이블
위에 놓고 있다. 식사 후에 마실 거를 담아갈 요량이다. 커피를 담아가는 사람, 오랜지 쥬스를 담아가는 사람,                                                          얼음물을 담아가는 사람, 나는 사과 하나 달랑 들고 왔다.
어제 점심과 저녁만 먹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에 살이 올랐다.
식탐은 금물이다. 맛있는 음식과 보기 좋은 떡이 많아서 먹으려 들면 끝이 없다.
어제는 먹는 유혹과 싸움에서 전사 노릇에 실패한 날로 기록된다.
아침 먹고 아내는 곧바로 줌바 클래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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