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 차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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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요샌 잠이 안 와, 늙어서 그런가 봐, 한국에 올 때 멜라토닌 좀 사가지고 오렴.”
카톡으로 메시지를 받았다.
강남에 사는 외사촌 누님한테서 받은 부탁이다.

오래간만에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누님이 말한다.
“외가 오빠가 죽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죽다니 왜?”
“뭐 나이가 들어서 죽은 거지.”
“올해에 몇인데?”
“여든아홉이야.“
“여든아홉?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죽다니?”
“기침이 쏟아져서 병원에 갔는데 약도 써보지 못하고 주었대. 그동안 병원에
가기 싫다고 한 번도 안 다녔다나 봐.”
“그랬구나, 그래도 호상이네.”
“맞아, 나도 장례식에 안 갔어.”
“왜요? 그렇게 친하면서 왜 안 가?”
“가 봐야 아는 사람도 없고, 애들만 왔을 텐데 가면 뭘 하니.”
“그래도 그렇지 갔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올케언니나 살아 있으면 몰라도 어른은 아무도 없는데 가 봤자지. 나중에 이야기는
들었는데 공군에서 나와 가지고 장사는 성대하게 치렀다더라.“
“묘는 어디에다가 썼는데?“
“대전 국립묘지 장성들 묘역으로 갔대. 장성은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네.”
“선산은 어떻게 하고?”
“거긴 산이 높아서 못 올라간 데나 봐, 아들이 없으니 찾아올 사람도 없고.”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 옛날 외할아버지가 산소 자리를 봐 놓고 자리가 좋다고
산에 오르시면 봐 놔둔 산소 자리에 누워 낮잠을 즐기셨다고 했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나도 가 봤는데 김유정 역 앞산인데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 산소 밑에 외가 아저씨는 누웠지만, 외사촌 형이 손주인데, 손주는 선산으로
가지 않았다. 앞으로 아무도 선산에 묻힐 자손은 없다.
멀리 앞을 내다보고 후손을 위해 넓게 자리를 장만해 봤자 다 헛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사촌 형님은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데다 공부도 잘했다.
언제나 형님은 집안의 자랑이요 내게는 롤 모델이었다.
형님이 서울 대학에 입학해서 2년째 되던 6월 어느 일요일이었다.
고향인 춘천에 놀러 왔을 때 6.25가 발발했다.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고향 집에 묶여 있었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 어느 대낮에 형님이 머슴과 함께 우리 집에 들렀다.
의용군에 끌려가느라고 고등학교 마당에 모였는데 점심때가 되니까 가서 점심 먹고
오라고 했단다. 가까운 우리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다.
그때만 해도 전쟁 초창기여서 인민군들도 순진했다. 점심을 집에 가서 먹고
오라고 돌려보냈으니 …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지혜를 발휘하셨다. 너는 가면 안 된다며 붙들어 놓았다.
머슴 홀로 돌려보내면서 어디 갔느냐고 묻거든 모른다고 하라고 신신당부해서 보냈다.
그때부터 형님은 우리 집 이불장 속에서 숨어 지냈다.
햇볕을 못 쏘여 피부가 송장처럼 하얘졌다.
후일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 2등으로 졸업했다. 별 둘을 달고 전역한 게 오래 전이야기다.
내가 형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여의도에서 사실 때다. 설이 돼서 찾아갔더니 집에
여자 손님들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형님이 대우구룹에서 전무로 일할 때여서 직원들이
신년 인사차 찾아왔던 것이다. 복작대는 집안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인사만 하고 나온 게 30년 전 이야기다.

“그래도 그렇지 장례식에는 가 봤어야지.” 원망 섞인 어조로 누님을 힐난했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친구도 없었다더라. 오래 살다 보니 친구들이 먼저 죽었대.”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한다.
“친척도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사람 보러 가면 뭐 하니?”
형님 이야기를 하면서 형님보다 3살 아래인 누님은 인생이 슬프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누구한테서 전화나 오지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사는 게 뭐 이러냐고 했다.
그러면서 “이젠 내 차례다” 하며 웃음 짓는 얼굴이 진짜 웃음 같지 않아 나도 슬퍼진다.
오래 산다는 게 축복인지 그렇지 않은 건지 다시 생각해 본다.
마지막 하늘 여행을 떠나신 형님께 평화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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