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받아본 손으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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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달 한국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저녁 늦게 운동길을 걷는다.
산 두렁길 양편으로 허리까지 자란 풀이 바싹 말라 있다.
성냥불 거대면 금방 산불로 번져나갈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걷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진다.
딴에는 빠르게 걷는다고 걷는다만, 같이 걷는 아내가 저만치 앞서간다.
땀 흘린 운동 끝에 샤워하고 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외손주 이름은 ‘버질’이고 벌써 초등학교 일학년이다.
한국에서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물론 아내이겠지만,
속으로만 그렇지 기다렸다는 표시는 내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기뻐하는 건 손주 녀석이다.
손주는 내가 장난감 사가지고 올 것을 간곡히 기다리고 있다.
올 때마다 하나씩 사다 줘 버릇했더니 으레 그러려니 하고 기다린다.
어쨌거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손주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지극히 따듯이 맞아준다.
환영한다면서 오래 기다렸다고 운을 뗀다.
시험지도 들고 왔다. 산수 문제 15개가 다 맞았다며 으스대며 보여준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내 어깨가 다 으쓱해진다.
그러면서 편지를 건네준다.
세상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지 얼마 만이냐?
감격스럽기도 하고, 손주가 기특하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펼쳐 읽어보았다.
편지 사연이 지 속마음을 고대로 표현한 게 참 보기에 좋다.
스펠링이 틀리기는 했어도 다 알아볼 수 있다.
솔직히 나보다는 장난감을 더 기다렸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늙은이를 뭘 보고 기다리겠는가?
대견하고 한층 더 귀엽게 보인다.
끌어안아 볼에 입 맞추고 엉덩이를 두들겨 준다.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신다기에 설렙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 나가신 다음, 늘 기다리고 있어요.
사랑해요.
맨 날 할머니에게 언제 할아버지가 돌아오실지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사랑 가득한 ‘버질’로부터.“

아이와 노인은 요일도 모르고 날짜도 모르고 산다.
만나면 웃음거리만 찾는다. 신 날 거리만 찾는다.
아! 손주 없는 사람은 무슨 맛에 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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