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이고 자유 분망한 나라다.
구대륙에서 가장 기피하는 블루진을 만들어내 유행시킨 나라이기도 하다.
여권운동을 시작한 나라도 미국이고, 양성평등을 부르짖은 나라도 미국이다.
여성 바지 패션을 주도한 나라 역시 미국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직장에서 여성은 바지를 입을 수 있다.
여성들은 오스카와 토니상 시상식에서도, 국빈 만찬에서도 바지를 입을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경기에 나설 때도,
대통령에 출마할 때도 바지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이 바지 입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야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복장규정 변경 추진은 옷맵시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악기 연주는 신체적으로 상당히 힘들다, 남녀 상관없이 많은 연주자는 공식 복장에
제약을 느낀다.
1980년대 잉글리시 호른 주자 줄리 앤 지아코바시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복장규정
혁명을 이룬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던 중에 호른의 키 하나가 그녀의 치렁대는 스커트에
걸려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한 그녀는 남성 단원들과 같은 연미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당시 그녀의 이 같은 연주 복장 변화는 일각에서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복장규정에 명예롭게 반영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에선 검은 드레스, 롱스커트, 혹은 팬츠수츠 중 선택하라는
옵션을 주고 있다.
거기에 더해 ‘연미복’을 입을 수도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미 오케스트라에서 최근 여성들은 눈부시게 비약했다.
막 뒤에서의 연주를 통해 단원을 뽑는 블라인드 오디션이 시행된 이후로
여성 단원은 급속히 늘어났다.
반 세기 전 뉴욕 필하모닉엔 풀타임 여성 단원이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은 44명 여성과 50명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오케스트라들은 공식적 콘서트에서도 여성 단원들의 바지 차림을 허용하고 있지만
뉴욕 필하모닉은 낮 공연, 청소년 콘서트, 공원 등 야외 콘서트, 현대음악 앙상블 연주
등에서만 바지 차림을 허용하고 있다.
시즌의 핵심 연주회인 이브닝 예매 콘서트에선 여전히 롱드레스나 롱스커트를 입어야 한다.
미국 20대 오케스트라 중 뉴욕 필하모닉만이 유일하게 공식적 이브닝 콘서트에선
여성 단원들의 바지 차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 그 규정이 바뀔 수 있을 듯하다.
176년의 전통을 가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뉴욕 필하모닉이 조용히 복장규정 현대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필하모닉이 복장규정 변경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성 평등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젊은 청중들을 끌어들이려고 애쓰면서, 클래식 음악계의 일부
인사들은 구식의 공식 복장이 새 청중들에게 거리감을 주고 있다고 우려한다.
여성들의 롱드레스뿐 만이 아니라 남성 단원들에겐 연미복과 흰 타이를 의무화한
복장규정 ‘상류사회의 시대’가 지나가 버린 지 오래된 작금에 맞는 일인가를
재검토하는 중이다.
복장규정 변경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1970년대 연주복을 당시 유행한 넓은 컬러의 벨벳 재킷과 나팔바지로 바꾸었다가
불과 1~2년 만에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던 예가 있다.
1958년엔 당시 뮤직디렉터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보다 현대적인 네루 재킷으로 바꿨다.
역시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몇 달 만에 포기했다.
2016년엔 비엔나 필하모닉이 유명 디자이너들에 의해 제작된 새 연주복을 선보였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가장 미래지향적으로 간주되는 LA필하모닉이 여성단원에게 블랙 팬츠 정장을 허용한 것도
지난해다. “오랫동안 로비한 결과였다”고 바이올린 주자 메레데스 스노우는 말했다.
바지 차림은 특히 첼로와 관악기 섹션의 여성 연주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그동안 치렁대는 긴 스커트가 연주에 자주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뉴욕 필하모닉에게 서부지역 필하모닉은 은근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176년 공식 복장 전통이 곧 바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