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만에 dog tag으로 돌아온 아버지

IMG_3343 IMG_3332

찰스 맥 대니얼 중사와 군번

‘찰스 H. 맥 대니얼, RA17000585’

미군 유해 55구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미육군 1기 병사단 8기병연대 소속

육군중사 찰스 호버트 맥 대니얼 중사의 인식표.

 

IMG_3344

2018년 7월 27일 오산 미공군기지에서 미군 유골 55구가 돌아오는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북한으로부터 돌아온 유골 55구 중에 유일하게 중서부 출신 육군 위생병의 인식표가 있었다.
찰스 맥 다니얼 중사의 것이다.
찰스 맥 다니얼은 미네소타 출신으로 세계 2차대전 참전 용사다.
그의 이름은 수천 명 행방불명자 명단에 지난 70년 동안 올려 있었다.
큰아들 찰스 맥 다니얼 주니어는 아버지의 군인 인식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매우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북한으로부터 유골들이 송환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골들이 돌아오는 중에 내 아버지가 있을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큰아들 맥 다니얼 주니어가 3살 때 아버지는 전사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아버지의 부대가 곧바로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아버지의 부대가 괴멸했다.
아버지는 위생병이었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부상자를 도와야 했다.
아버지 친구였던 같은 부대 위생병이 증언하기를 아버지가 전사했다고 했다.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지난 68년 동안 우리 가족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나의 아버지는 세계 2차대전에서도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큰아들 주니어는 회상한다.
아버지가 전사한 다음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데리고
친정아버지가 있는 인디아나 농장으로 돌아 왔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전쟁에서 행방불명 됐다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았다.
맥 다니얼 주니어는 지금 71세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동생과 함께 친할아버지 농장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가 이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다.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고 한다.
앉은 자리에서 끝없이 먹었다고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체중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는데 아이스크림만큼은 예외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랑해서 두 아들과 놀기를 즐겼다.

큰아들 맥 다니얼 주니어도 군에 입대해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위생병이 되었다.
후일 군목으로 전과했다.
한 번도 아버지의 유품일망정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맥 다니얼 주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수천 명 전사자들이 북한 땅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이번 55구의 유골 중에 나의 아버지가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
내게는 인식표 하나면 충분하다. 아버지는 영웅이었다.
이것이 그가 죽는 순간까지 지니고 있었던 인식표이며 68년이 지난 지금 내 손에 쥐어졌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IMG_3331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아버지 찰스 호버트 맥대니얼 중사의 차남 래리 맥대니얼(위)과
장남 찰스 맥대니얼 주니어가 68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인식표를 살펴보고 있다.

찰스 맥 대니얼 중사 인식표 뉴스를 접하고 나 역시 가슴이 울컥 했다.
한 살, 세 살 된 어린 것들이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
남편 없는 생을 살아야 했던 젊은 과부.
맥 다니얼 중사 전사로 남겨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참혹한 인생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는 김일성이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