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효도(孝道)는 도(道)인가?
블로그를 산책하다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만났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병석 시인의 ‘역모’.
‘역모’를 읽으면서 공감을 넘어 이상야릇한 마음이 일어난다.
당연히 나의 어머니가 떠올려지고 은연중에 비교하게 된다.
역모 전병석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넘어간다
어머니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스물한 살 때 돌아가셨다.
한동안 살면서 사무치게 그리운 적도 있었다.
젊어서 그리움이 간절할 때는 만일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매년, 비행기표 열두 장을 사서 드리고 언제든지 한국 다녀오시라
하겠다고 자위 섞인 위안을 스스로 해본 적도 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며느리 손자들을 다 보셨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만도 않았을 거란 생각도 해 본다.
아내와 집안 일로 의견 충돌이 생길 때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는 나보다 더 큰 갈등을 겪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의 짓거리로 속이 썩으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일찍이 자식들과의 갈등을 눈치채시고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신 건 아닐까?
시처럼 간단명료하게 완벽한 의미를 전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글도 없다.
‘역모‘라는 시는 효도(孝道)를 앞에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이다.
과연 孝는 道일까? 효가 길이요 진리인가?
우리 마음에 새겨 있는 효도라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죄짓는 마음을 갖게 한다.
효도는 조상이 만들어낸 말이다. 부모와 조상을 잘 공경하라는 뜻에서 만들었다.
농경사회인 조선 시대에 효도는 그 의미를 백십분 발휘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는 말은 못 된다.
차라리 孝道보다는 孝心이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다.
그게 그 말 같아도 효도는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 무겁게 깔려있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 때문에 남의 눈이 두려워서 진심 아닌 짓을 행하는 예도 많다.
마치 의무적으로 효도 관광을 시켜 드려야 한다거나, 곡을 해야만 한다는 식이다.
반면에 효심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속으로 흠모하는 마음이 더 짙다.
진심이 깔린 진짜 속마음이다.
“엄마 뭐 먹고 싶어 사 드릴께.” 효도하는 것처럼 묻지만 사실 늙으면 먹고 싶은 게 없다.
차라리 “엄마, 나 뭐 먹고 싶은데 엄마도 같이 먹을래?” 이렇게 묻는 게 진짜 효심이다.
엄마는 따라서 한 입 먹어보는 거다.
예전에는 성묘를 앞당겨 다녀온다는 건 생각조차 못 했다.
더군다나 추석 연후에 해외로 놀러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생각이 자기중심으로 바뀌면서 오만가지 아이디어가 속출한다.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과학시대에 어떠면 효도는 윤리, 도덕처럼
뒷전으로 밀려난 허례허식일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