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신문 가지러 밖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비는 오지 않았다.
날이 밝은 다음, 아침을 먹으러 내려왔더니 비가 온다.
처음에는 조금씩 내리더니 점점 굵어진다.
요새는 일기예보도 잘 맞춘다.
비 오는 날짜만 맞추는 게 아니라 시간까지도 맞춘다.
부슬부슬 오는 비가 온종일 올 모양이다.
캐나다 친구에게 책 한 권 붙여주려고 샌 리안드로 우체국에 갔다.
샌 리안드로는 우리 집과 차로 15분 거리다.
불과 15분 거리인데도 폭우가 쏟아진다.
멋모르고 우산도 안 가지고 갔다가 그만 낭패를 당했다.
우체국 앞에 흑인이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월남인이 서서 구걸한다.
초라하고 꾀죄죄하게 차려입어서 월남인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쳤지만,
어떠면 한국인 인지도 모르겠다. 동양인은 다 그게 그거니까.
한번은 타호 카지노에 갔다가 입구에서 어떤 동양인이 고급 시계를 보여주면서
팔아달라고 한다.
LA에 가야 하는데 돈 다 잃고 돌아갈 차비가 없어서 시계를 팔아 여비 하려고 한단다.
나는 시계가 필요 없어서 그만뒀지만, 같이 간 친구가 저쪽 귀퉁이로 데리고 가서
시계를 팔아줬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차비 없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고 늘 거기서 그런 식으로 시계 장사하는 거란다.
참 세상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족이 멀쩡한 남자가 어디 가서 직장을 얻어도 그만 못하겠느냐만,
하필이면 문 앞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 아닌 구걸을 하다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내린다.
불과 15분 거리인데 샌 리안드로는 폭우가, 우리 집은 구슬 비가 내리다니
참 하늘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터넷이 멎었다. 다섯 시간 후에나 들어올 거라며 전화 걸지 말아달란다.
비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이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 케이블 선이 끊기면 인터넷은 물론이려니와 TV도 안 나오고 전화도 먹통이다.
모두 케이블로 연결 되어 있어서 데드라인인 것이다.
집에 있어도 답답하다.
어슬렁대다가 샌리안드로 쇼핑센터에나 나가봤다.
주차장에 차 댈 틈이 없다. 사람들로 붐빈다.
미국 경기가 좋다더니 사람들 쓸 돈이 많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돈만 생기면 쓰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오늘 다 써버리고 내일은 죽으려는지 쓰고 싶어 못 참겠다는 표정이다.
오후 늦게 비가 완전히 멎었다.
파란 하늘이 군데군데 보인다.
산불이 다 멎었다는 반가운 뉴스다.
동시에 이재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방송이 줄을 잇는다.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이라 모두 들떠 있는데 월마트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생활해야 하는 화재 난민들을 생각하면 추수감사절이라고 즐겁지만은 않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
맑은 하늘이 보일 것 같다. 희망에 찬 파란 하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