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우리는 제일 행복했다.
큰딸이 일곱 살, 막내딸이 다섯 살 때다.
새로 지은 큰 집을 사서 막 이사한 지 한 달쯤 됐을 것이다.
뒷마당 잔디밭과 정원수 사이를 뚜렷하게 경계 짓기 위하여 1m가 좀 못 되는
폭으로 시멘트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
시멘트가 굳기 전에 큰딸에게 손도장을 찍게 했다. 밑에는 큰딸 이름을 새겼다.
바로 옆에 막내딸도 손도장을 찍고 이름을 새겼다.
나는 기념비적 모멘텀을 만들려고 했는데 딸이 보기에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딸이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도장을 머리 위로 향하게 하고 잔디밭에
벌렁 누었다. 손도장이 마치 묘비처럼 말이다.
나는 흉측한 느낌이 들어 야단을 치고 일어나게 했다.
모두 한바탕 깔깔대고 웃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뒷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아내는 연기가 왜 나만 따라다니느냐면서 불판을 빙빙 돈다.
익어가는 불고기를 막 집어 먹으면서 모두 즐겁고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시원한 맥주 넘어가는 목구멍이 짜릿했다.
그때가 우린 제일 행복했다.
미국 출산율이 감소했다. 감소했다고는 해도 한국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양호하다.
한국은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출생률 1.1%로 여자 1명이 아기 1명을 낳는 셈이다. 아니 그보다 더 떨어졌다던가?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이다.
한국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를 좋아하지만, 저출산율은 그게 아니다.
먼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문제이고 그다음으로 아기를 안 낳겠다는 게 문제다.
가임 연령층 분위기가 결혼도 아이도 NO이다. 세상은 그렇게 흐르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왜, 어디서 형성되었는가?
지난 반세기 동안 잘살아보자는 운동에서부터 시작됐다.
60년 전 필리핀은 우리보다 잘살았다.
필리핀 사람들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만,
행복지수도 같은 수준이고 출산율도 같은 수준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필리핀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됐다.
그러면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졌는가? 글쎄요~
한국은 잘살아보자는 운동이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잘살게 되기까지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아이들의 성적위주 경쟁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취업 경쟁은 또 어떻고?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 또한 비굴하리만치 치열하다.
경쟁이 너무 심해서 친구도, 가족도, 형제도 없다.
심각한 경쟁 구도를 거쳤어도 결국에 명퇴로 밀려나 처절한 노후를 맞아야 하는
기성세대를 보면서 자란 청년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학교와 학원을 쉴 틈 없이 뛰어다니면서 자라난 지금의 청년들은
내 자식에게는 나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넘겨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너무 많다.
청년 일자리, 신혼부부 주거문제, 아이 보육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막고 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동거는 하되 아기는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사회의식의 변화와 가치관도 한 몫 한다.
결혼과 출산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개인 행복추구와의 저울질에서
전자가 밀리고 있는 현실이다.
설혹, 아기를 낳더라도 육아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엄마와 아빠의 행복은 포기해야
하는 기현상의 사회 구조가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행복 추구다.
결혼이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그래도 결혼하고 싶을까?
아이가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그래도 아기를 낳고 싶을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에서의 탈출은 어렵다.
이런 생각은 자기만의 시각과 자신의 경험에서 싸인 정보나 자료 내지는 지식에서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돌이켜 세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아기 낳으면 거금을 주겠다는 식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 서는
진정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시대라고 해도 개중에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젊은 부부도 많다.
그들이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홀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해답은 없다.
나도 싱글로 30까지 살아봤지만, 그달 그달 버는 대로 다 쓰면서 살아봤지만,
결국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게 더 행복했다.
다 살고 난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막 자라날 때, 지금 손주들 같은 나이였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