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경춘 고속도로 금곡 터널이 보인다.
한식이라 성묘하러 갔다.
예전에 비해 진달래며 개나리꽃이 만발하다.
섬진강가에 활짝 핀 벚꽃 못지않고, 캘리포니아 랭커스터 야생화가 부럽지 않다.
진달래만 한 우리 꽃이 어디 있으며 개나리꽃만 한 봄소식이 어디 있더냐.
동산에 만개한 봄꽃에 반해 한동안 헤집고 다니느라고 길을 잃을 뻔했다.
가는 곳마다 진달래요 발 딛는 곳마다 개나리다.
산 능선에 꽃이 범람해 넋을 잃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흉내를 낸들 진달래의 고운 분홍색을 어찌 감히 따라오랴.
노랗지만 아주 노랗지는 않고, 그렇다고 흐리지도 않은 노란 개나리가 부드럽고 연하다.
진달래와 개나리는 빛깔이 강렬하지 않고 흐릿하지도 않은 것이 민족의 정서를 닮았다.
무궁화의 은근과 끈기가 민족의 혼을 닮았다고 했는데
내가 보니 진달래며 개나리도 민족의 혼을 닮았다.
요란한 화장을 한 것도 아니고 세수도 안 한 칙칙한 화상도 아니다.
진달래꽃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건 깨끗하고 청순한 이미지다.
우리 꽃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은은하고 고상한 분홍과 노랑은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다정하고 착해 보인다.
옛날 영변의 약산 진달래나 지금 동산에 핀 진달래나 변한 게 없다.
모두가 변하지 못해 안달을 떠는 세태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고귀한가.
나무꾼이 진달래꽃 한 묶음 손에 들고 프러포즈하던 시절에는 이혼도 없었고 인구 절벽도
없었다. 프러포즈의 꽃이 장미로 변하면서 이혼이 생겨났고 백만 송이 장미를 원하면서
애는 안 낳겠다고 돌변했다.
새로 조성한 묘와 그 밑에 자리만 잡아놓은 가묘
평내 천주교 공동묘지는 1950년대에 생겨난 명동 성당 공동묘지다.
오늘날 공원묘지처럼 계획하고 설계한 공동묘지가 아니다.
재래식 개념으로 개개인이 터를 사서 묘지를 조성했다.
공동묘지가 넓은 것도 아니어서 야산이 다 차니까 70년대부터 중지됐다.
반세기가 넘어 오래되다 보니 주인 없는, 아니면 돌보지 않는 묘지가 생겨났고
황폐해 갔다.
최근에는 공동묘지 입구에 가건물을 짓고 명동 성당에서 나와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리한다.
내용을 알고 봤더니 무연고자 묘지는 없애버리려고 한단다.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묘지를 이장하거나 없애 버려주겠다는 업체가 나타나 영업 중이다.
나는 진달래며 개나리를 보면서 은은한 애정과 연민이 피어나 꽃을 따라 공동묘지를
배회하다가 재개발 붐을 발견했다.
오래된 산동네를 재개발해서 아파트를 짓는 줄만 알았는데 공동묘지도 재개발 붐이
일어나고 있다.
헐고 피폐해서 없애버린 묘역에 새 묘를 조성 한다.
이번에는 엄청 넓게 자리 잡고 으리으리하게 묘를 꾸몄다.
마치 50평짜리 비싼 아파트가 들어선 것 같다.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으나 위화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바로 그 옆에 초라하고 누추한 작은 묘가 눈에 띈다.
갑질 하면서 으스대던 사람은 죽어서도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떵떵대며 갑질 중이다.
가난 속에서 핍박받던 사람은 죽어서도 여전히 주눅 들어 지내야 한다.
무언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땅도 작은 나라에서 죽은 사람의 묘를 크고 웅장하게 차리면 묘지가 차지하는 면적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에게 위화감을 줄 뿐만 아니라 엉뚱한 생각을 갖게 부추기는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하루빨리 선진국처럼 묘지는 누구나 한 평밖에는 차지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미국처럼 대통령부터 한 평에 누어 국민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 묘역이라고 웅장하고 거창하게 해 놓으면 그걸 보고 국민이 모두 대통령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대통령이 별거냐, 잠시 동안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책이지.
대통령이 마치 나라의 주인인 것처럼 임금님 의식을 가지고 떠받들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나,
떠받들어 주려는 것이나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
죽은 다음에 누구나 공평하게 한 평만 차지하는 사회가 참다운 민주사회이다.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죽어서나마 평등한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