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걷던 길 오늘 또 걷는다.
봄꽃 소식이 새롭게 들리지 않을 만큼에서 해가 길어졌다는 걸 체감한다.
겨울 같았으면 벌써 어두워졌을 때인데도 봄이라고 날이 훤해서 나다녀도 된다.
지난겨울 비가 많이 와서 산야가 충분히 녹색으로 물들었다.
들풀도 예년보다 키가 크고 실하다.
녹색 들판을 달려온 바람도 녹색으로 물들었는지 싱싱하고 푸릇푸릇하다.
그제 걸으면서 아름다운 녹색을 사진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걸으면서 그새 녹색이 변색했음을 한눈에 알아보겠다.
척박한 흙은 성질도 거칠어서 며칠만 비가 안 와도 금세 본성을 들어냈다.
하루 이틀 바람 불고 따뜻하면 금세 수분이 날아가고 녹색 풀은 제트 속력으로 말라간다.
풀도 알아서 짧은 기간에 빨리 성장하고 씨 맺고 자손을 남기려고 바쁘다.
어느 생명체든 스스로 살아남는 기술을 알고 있다.
과외 공부도 안 했건만 알 것은 다 안다.
풀에게 물어 본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엄마가 작년에 일찍 말라 죽어서 내 스스로 터득해야 했단다.
실버 루핀(Silver Lupine: 부채 꽃)이 작년에 피었던 자리에 또 피었다.
흙이 비옥하면 아이 키만큼 자라고 꽃도 풍성할 텐데……
이 언덕 척박한 환경에서는 아이 종다리 반도 못되는 것이 꽃도 부실하다.
그러면서도 매년 피어난다.
가난도 유전이다.
뮤을스 이어스(Mule’s Ears: 노새 귀 꽃)도 작년에 피었던 그 자리에 또 피었다.
겨울에 비가 많았기에 배가 터질 만큼 실컷 마셨는지 목이 길다.
긴 목은 꽃 무계를 감당하지 못해 할미꽃처럼 구부러졌다.
꼿꼿하게 서서 하늘을 쳐다봐야 하는 꽃 얼굴이 구부러진 목 때문에 고개 숙여 흙을 본다.
욕심 부려 배터지게 마실 때는 미처 몰랐다.
평생 머리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고통을……
인생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결정을 요구 한다.
잘나가는 시절 욕심 부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평생토록 치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