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가야만 할 데가 있다면서 지 엄마, 그러니까 내 아내더러 학교가 끝나면 애를
픽업해다가 유니폼으로 갈아입혀서 축구팀에 데려다주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아내는 오늘 병원 예약이 있다면서 나에게 임무를 떠넘긴다.
모처럼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자니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딸이 어렸을 때다. 실어다 주고 실어오던 초등학교에 이번에는 손자를 실으러 간다.
30년도 넘었다. 딸 둘이 이 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던 때가….
어느덧 손자가 같은 학교에 다닌다.
옛날에는 미스터 혼다가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학교는 변한 게 없다. 건물도 그대로고 수업도 고대로 한다.
학생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았다.
주자장도 그대로인데 사람만 바뀌었다.
오랜 세월 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오늘 손자를 픽업하러 가보니 감회가 새롭다.
손자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지 친할아버지는 미국식으로 그랜드 파라고 하면서
나를 부를 때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꼬마들이 왁자지껄 하면서 걸어 나온다. 내 눈에는 손자가 금세 띈다.
그러나 손자 눈에는 내가 띄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들끼리 떠들 거 다 떠들며 놀기만 한다.
저 녀석이 학교 끝나면 곧바로 축구하러 가야 하는 걸 알고 있을 터인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놀고 있는 것 같다.
형제가 없어서 외롭게 혼자 자라니 학교에서나마 실컷 놀게 내버려뒀다.
어쩌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잽싸게 달려온다.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는 축구팀에서 뛰는 걸 좋아한다.
신이 나서 “라라라~” 콧노래를 부르며 지방으로 들어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배가 출출할 때가 되었으니 뭐 좀 먹고 가라고 해도 싫단다.
코치가 물을 마시라고 했다면서 물 한 병을 챙겨 든다.
손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며 들려준다.
연습하다가 20분간 진짜 게임을 한단다.
친구 크리스티는 내편이어서 둘이서 공을 주고받는단다.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서 몸을 이리 꼬고 저리 비틀면서 께적거리던 녀석이
저 좋아하는 축구는 시키지 않아도 선수복 갈아입고 날아갈 듯 번개처럼 드나든다.
사람은 지가 좋아하는 걸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가 좋아하는 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고, 저절로 열심히 잘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숨어서라도 하고 만다.
이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도 그랬다. 다 늙은 지금도 그렇다.
“니 엄마는 뭐가 바빠서 너 픽업도 안하고 어디 갔니?“
모르겠다며 엄마 바쁘지 않단다. 맨 날 저녁이면 소파에 누어서 TV나 보다가 뭐 먹고
싶으면 날더러 냉장고 문 열고 뭐뭐뭐 가지고 오라고 시킨단다.
더는 묻지 않았다.
딸이 어렸을 때 내가 하던 짓을 딸이 지 아이한테 고대로 써먹는 것이 내 복사판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엄마 말 잘 들어라, 그러면 엄마가 더욱 사랑해 줄 거야.”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때로는 해야만 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