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한국에 나가고 없다.
덩그러니 큰 집에 혼자 지내기에 적적할 것 같아도 난 그렇지 않다.
늙어가면서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해서 오히려 누가 곁에 있는 게 불편하다.
딸은 손주가 방학이라 수영 교습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면서 내게 떠맡겼다.
하루에 30분 교습받는 것도 일이라고 시간 맞춰 가야하고 지켜 있다가 데려와야 한다.
아침 8시에 내게 와서 오후 3시가 넘어야 데리러 온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날이 지나면서 손주 녀석도 요령이 생겨서
할아버지를 요리조리 속여 먹는다.
맛있는 게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데는 명수다. 3주 동안 싸우다 보니 지가 먹을 만한 건
다 없어졌다.
빈 냉장고에 빈 펜트리에 아무 것도 없다.
손주 보는 건 거저먹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고된 일이다.
같이 놀아 주던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사고를 처도 치고 만다.
아이가 있는 동안은 운동 나갈 엄두도 못 낸다.
집 안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인 오늘은 손자가 오지 않는다.
모처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걸어 나갔다. 빨리 걷는 게 좋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속력을
내 보았다.
역시 집에서 하는 운동과 밖으로 나와 걷는 운동은 다르다.
트레이드밀을 걸으면 걸으면서도 지루하고 따분해서 TV를 보면서 걷는다.
TV가 없으면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걸어야 한다.
그러나 야외에서 걷는 건 지루하지 않다.
시야에 펼쳐진 자연이 두뇌를 지루하게 놔두지 않는다. 새록새록 볼거리를 내준다.
실내에서 걷는 건 시간과의 싸움이다. 30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열심히 걷는다.
시간이란 시각과 시각 사이를 말하니까 결국 세월과의 싸움이다.
야외에서의 걷기는 거리와의 싸움이다. 얼마만큼을 돌아와야 한다.
거리란 시간 동안에 이동할 만한 공간적 간격을 의미하니까 결국 간격과의 싸움이다.
세월과 싸우든 간격과 싸우든 싸우는 건 마찬가지다.
공원을 돌아 집에 다 오다가 노란 고염이 다닥다닥 달린 나무를 보았다.
아내가 맛있다고 하던 고염이 금년에도 어김없이 익어 넘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염은 많이 떨어져 있으나 맛있어할 사람이 없으니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널브러진 고염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과 아쉬움이 얼버무려지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