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산호세를 향해 달렸다.
퇴근 시간이면 트래픽이 많아서 고속도로라고 해고 차가 밀려서 가지 못한다.
Car Pool Lane을 이용하려고 아내를 옆에 태우고 갔다.
카 풀 레인은 고속도로 맨 안쪽 차선을 두 사람 이상이어야 달릴 수 있는 제도다.
당연히 빨리 달릴 수 있어서 반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파리바게뜨에서 회장님을 기다렸다.
빵 한 입 먹으면서 맛있다했는데 아내가 들려주는 빵 가격에 갑자기 빵맛이 별루다.
회장님이 나타나셨다. ‘북가주 6.25 전쟁 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님이시다.
오랜만에 만나 뵙는데도 건강은 여전하시다.
‘뽀빠이 이상용’ 씨가 출연하는 아침마당을 끝까지 보셨다면서 기분 좋아하신다.
나도 같은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기분 좋게 해 드렸나 궁금했다.
뽀빠이 이상용 씨는 유별나게 작은 키를 역으로 이용해서 성공한 사례를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키 작은 사람들의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멘토를 보고 마치 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회장님 키가 작아 보였다.
나는 같은 프로그램을 같은 시간에 보았지만 작은 키 보다는 뽀빠이의 지칠 줄 모른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회장님을 만나기로 한 것은 문예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을 국가유공자회에 기부하기
위해서다.
회장님한테서는 당연히 6.25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6.25 때 21살이었다고 하신다.
내 머릿속 계산기는 보태고 빼기를 해 가면서 이분이 몇인가를 계산했다. 계산을 막 마치고 났더니
30년생이라고 하신다. 뭐? 30년생이면 89세이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만 놀란 게 아니라 옆에 앉아있던 아내도 놀랐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구가 작아서 안 늙어 보였나 했더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얼굴에 주름살도 하나 없고 검버섯도 없다.
반질반질한 피부가 아내보다도 곱다.
거기에다가 정신이 말똥말똥한 게 나하고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내가 되물어 보고 또 묻는
노인 행세를 하고 있다.
6.25 때 사범학교를 나와 정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군 징집에서 면제되었지만 나라가
위기상황에 몰렸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느냐 해서 지원해서 군에 나갔단다.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길을 가다가 길옆 도랑에 엎드려 총 쏘는 시늉만 하다가 또 걸어서
사단 본부로 들어갔다고 한다.
휴전하던 날 판문점에서 서명은 했지만 강원도 사창리에서의 전투는 밤 10시가 돼서야
멎었다.
지프를 타고 산 GP에 올라가 총성과 함께 날아다니는 불빛이 언제 끝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각 10시가 되니까 쌍방의 총성이 동시에 끝나버리더란다.
전쟁 이야기는 끝일 줄 모르고 이어갔다.
아내는 지루해서 그만 나가기를 원했지만 노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회장님이 마시겠다고 들고 와 병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셔버린 생수가 하필이면
일제 ‘Fuji’ 생수다.
회장님이 얼굴을 찌푸리며 맛이 고약하다고 했다.
나는 마셔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일제라면 물맛까지도 고약해져 버린 오늘날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