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처럼 무서운 병도 없다.
깜빡 잊고 깜빡이 안 켰다가는 접촉 사고를 낼 수도 있고 깜빡 잊고 스토브 불을
안 껐다가는 국이 다 졸아 냄비가 탈 때도 있다.
깜빡이 병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섭기는 병보다 더 하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려고 밖에 나가면서 앞 잔디밭에 스프링클러를 틀어놓았다.
매일 5분씩 주는 물이어서 잠시 후에 꺼야 한다. 여느 때는 깜빡하고 잊어버릴까 봐
스프링클러 트는 스틱을 들고 다닌다. 들고 있으면 잊어버릴 염려가 없어서다.
오늘따라 스틱을 벽에 기대 새워놓고 잠시 후에 꺼야지 생각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TV로 시청하는 야구이지만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경기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의 경기가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했다.
어제 이겼으니 오늘은 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1:0으로 앞서간다.
오클랜드 에이스가 휴스턴 애로스와의 경기도 7시에 시작했다.
두 경기를 다 보느라고 TV 채널을 이리 돌렸다가 저리 돌렸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본다.
아메리칸 리그 서부조에서 휴스턴과 오클랜드는 같은 조에 속한다. 휴스턴이 오클랜드보다
9경기나 앞서 있어서 휴스턴은 챔피언 리그에 이미 올라갔고 오클랜드는 와일드카드를
바라보는 처지다.
다른 경기와는 달리 오클랜드가 휴스턴을 이기면 오클랜드는 승점이 가산되고 휴스턴은
한 점을 잃게 되기 때문에 한꺼번에 두 게임을 이기는 셈이 된다.
오늘 저녁 경기를 기필코 이여야 하는 이유이다. 게임은 막상막하로 이어졌다.
오클랜드 에이스가 한 점 홈런을 치면 휴스터 애로스가 홈런으로 따라 붙는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도 의외로 잘하더니 3:2로 앞서간다.
샌프란시스코 역시 네이셔널 리그 서부조에서 와일드카드를 바라보고 악착같이 나서고 있다.
다리 건너 자이언트나 오클랜드 에이스나 모두 내가 좋아하는 팀이다.
어느 경기에서나 내편이 이겨야 한다. 내편이 지는 꼴은 속이 상해서 봐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것은 필수다.
어젯밤 한 게임에서 홈런 세 개나 날렸던 에이스의 채프맨이나 홈런 두 개나 날렸던
올슨의 방망이가 오늘따라 시치미를 뚝 따고 침묵을 지키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터져
환장하겠다.
경기는 2:2 동점으로 연장전으로 들어섰다. 반면에 자이언트는 일찌감치 연장전 11회에서
홈런을 날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을 10:9로 이겼다.
남은 건 오클랜드 에이스의 연장전이었다. 10회, 11회, 12회를 거듭하면서 승부가 날 것
같으면서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는데 게임은 끝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밤새게 생겼다. 결국 승부는 내일 알기로 하고 TV를 껐다.
자기 전에 CCTV로 앞마당을 내다봤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게 잘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내일 아침에는 안개가 끼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아침 늦게까지 잤다. 지난 며칠 동안 몹시 더웠다. 마빡이 벗겨질 것처럼 햇살이
뜨거웠다.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 창문을 다 열어놓고 홑이불도 안 덮었는데도 더웠다.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었나 하면 한두 시에 깨어나 창문 닫으랴 화장실 들리랴
서성대다가 잠을 설쳤다. 이틀이나 잠을 설쳤더니 어젯밤에는 잠이 잘 왔다.
아침 7시 반이나 돼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에이스 게임 스코어가 어떻게 됐어?“
“에이스가 이겼어.” 한 마디에 속이 후련해진다. 어떻게 이겼나, 홈런은 누가 쳤나. 궁금했다.
연장전에 들어서면 선수들은 빨리 끝내려고 방망이를 휘두르기 마련이다. 그 통에 홈런이
터지면서 승부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13회 후반에서 크로스 맨의 끝내기 안타로
점수가 나는 바람에 3:2로 이긴 것이다.
아무튼 신나는 뉴스를 들어가면서 밖에 나가 신문을 집어오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 이게 왼 일인가? 앞 잔디에 스프링클러가 틀어져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물이 언제부터 터져 나오는 거지?
아뿔싸 어제저녁에 틀어놓은 게 아닌가. 밤새도록 수돗물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는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인도교 가장자리 빗물 흐르는 도랑으로 밤새도록 수돗물이 철철 흘러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스프링클러 끄는 스틱을 찾아보았다. 내가 늘 세워두는 문 옆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현관을 내다보았다 어제저녁 내가 벽에 기대 세워놓은 대로 있는 게 보인다.
물을 잠그고 수돗물이 흘러간 흔적을 따라 경사진 인도교로 걸어가 보았다. 물은 장마철
도랑 물줄기처럼 가랑잎을 옆으로 밀어놓고 자기들만의 물길을 내놓고 흘러갔다.
남들이 봤을까 봐 창피하기도 하고 수돗물 값이 얼마나 더 나올지 걱정도 됐다.
아내에게 사실을 고했다.
“어쩐지 부엌 수도 물발이 약하더라 했지.” 하면서 왜 스틱을 들고 들어와야지 밖에다가
놔두면 잊어버리는 거 아니냐고 야단이다. 지난겨울 비가 많이 와서 물 부족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작년 그러께 같았으면 누군가 신고했을 것이고 그러면 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늘 물 끄는 걸 잊어버릴까 봐 일단 물을 틀면 스틱을 들고 들어오는데 어제는 잠깐 있다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 밖에다 놓고 들어왔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놓쳐서는 안 될 야구 경기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두 팀이 동시에 아주 중요한 게임을 벌리는데,
막상막하로 내닫는데 어찌 놓칠 수 있었겠는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자그마치 13시간 동안 스프링클러를 틀어놓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길이어서
누구도 우리 집 돌 벨을 눌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금요일 밤을 지나 토요일 아침이어서
동네 사람들도 늦잠을 자는지 고요하기 짝이 없다.
늙으면 깜빡깜빡한다지만, 스프링클러를 틀어놓고 깜빡한 것이 늙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곧잘 스프링클러를 틀어놓고 잊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에 나가보면 스프링클러가 켜있는 것이다.
지금은 늙었다는 이유로 좀 더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그나마 오랜동안 스프링클러를
잠그지 않는 일이 없었다.
열 번, 수무 번 다짐한다.
잠시 후에 다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깜빡”이라는 도끼에 발등 찢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