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바트(전철)를 타고 집 근처까지 왔다.
이제 차에 짐을 싣고 가야 하는데 자식들은 모두 바빠서 부려먹을 수 없으니
나를 실어다 줄 사람은 늙은 누님밖엔 없다.
지나가던 젊은 친구가 주먹을 내밀면서 내 주먹과 마주치기를 원한다.
내가 샌프란시스코 49er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었더니 나와 같은 팬이라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금년 씨즌에 49er가 엄청 잘 뛴다. 10승 1패이니 조 일위 자리를 꾀 차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내의 차를 끌로 보슬비 나리는 페어 몬 고갯길을 넘는다.
FM 96.5 KOIT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와 한 해가 다 갔다고
알려 준다. 모르기는 해도 내 인생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으리라.
세수나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헐렁한 바지에 허름한 윗도리를 입고 덜래 덜래
멕시칸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멕시칸 식품점에 가면 우리가 먹는 배가 있어서 그리로 간 거다.
배라고는 자질구레한 것들뿐이라 먹을 만한 게 못된다.
대신 수박이 싸서 수박으로 집어 들었다.
굵고 싱싱한 자색양파가 흰색 양파보다 더 많이 싸여 있다.
역시 서양인들은 자색양파를 좋아하고 한국인들은 흰색 양파만 먹는다.
헐렁하게 차려입고 다녀도 되는 데가 미국이다.
신발을 질질 끌고 다녀도 이상할 게 없는 미국은 태평한 나라다.
남들이 다 그러고 다니니까 나도 그러고 다녀도 속이 편하다.
실은 서로 비교하지 않는 문화권이 돼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하다못해 구멍가게를 가더라도 입을 건 입고 가야 한다.
한국은 생다지로 추워서 든든히 끼어 입지 않고 나갔다가는 한 대 얻어맞는 것처럼 차갑고
얼얼한데 비해서 샌프란시스코는 우중충한데다가 옷깃으로 스며드는 쌀쌀한 날씨여서 기분
나쁘다.
기후에 익숙해지려면 며칠 걸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다지 춥지는 않아 오버코트 없이 나다녀도 된다는 점이다.
일요일은 아침부터 풋볼 중계다. 49ers가 볼티모에게 석패하고 말았다.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곧이어 레이더스 게임이 벌어지니 할러데이 시즌에는 볼만한
경기가 많아서 좋다.
뉴욕 록크펠로 광장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혔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된다.
샌프란시스코 유니온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도 열렸다. 등불 17000개가 반짝인다.
어린이 병원에 적선, 선물 못 받는 아이들을 위해 아기곰인형 적선, 두고 먹을 수 있는 식료품 깡통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선, 같이 나누자는 광고가 차고 넘친다.
산등성이 목장 풀밭이 갈색으로 변했는데 검은 소들이 흩어져서 갈색 풀일망정 배를
채우고 보겠단다.
소와는 달리 날씨가 구중중하면 새들은 나다니지 않는다.
온종일 어딘가에 숨어서 꼬박 굶는 모양이다.
어떤 때는 며칠씩 굶어도 끄떡도 없다.
새나 동물들은 하는 일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일박에 없는데, 그만큼 먹어야 하는데,
비가 오는 때는 어찌 며칠씩 먹지 못하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
사람이 며칠 굶었다가는 까부라져 드러누워 못 일어날 것이다.
그거 보면 새는 체질적으로 사람보다 낫다.
새의 눈에도 색깔을 구분하는 판단력이 있어서 화려하고 보기 좋은 수컷을 선호한다니
참 꼴불견이다.
사람은 차려입을 수도 있고 헐렁하게 입을 수도 있고, 비교하면서, 경쟁하면서 살 수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먹을 수도 있다.
지 맘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축복은 충만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