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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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한국에 나가 있는 바람에 손주 하굣길 픽업은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손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셀폰이 울린다.
낯선 번호지만 같은 지역 번호여서 적어도 광고성 전화는 아니겠지 하고 받았다.
뜻밖에도 손주 학교 선생님이란다.
학생 엄마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아서 메시지를 남겼다면서 내 전화번호가
보호자란에 적혀있었는지 내게 거는 거란다.
그러면서 손주 귀에 이물질이 들어갔으니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단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멀쩡히 걸어오는 손주를 붙들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귀에 뭔가가 들어갔단다. 이런 답답할 일이 있나?
집에 와서 엉뚱하게 손주를 환자 취급하게 되었다.
환자는 아니지만, 임시 환자가 하자는 대로 다 들어줘야 하는 거다.
손주는 옳다구나 이게 기회다 했는지 TV 리모컨을 들고 만화를 틀더니 소리를 크게 올린다.
귀가 잘 안 들려서 그렇단다.
지 엄마는 자식이 초코 밀크 마시는 걸 싫어하지만 오늘은 내가 타서 주었다.
환자 취급을 톡톡히 해 주었다.

내가 손전등을 켜 들고 손주의 귓속을 들여다보았다.
조그마한 핑크색 플라스틱 조각이 보인다. 잘하면 꺼내도 될 것 같다.
핀세트를 넣고 집으려 했더니 손주는 아프다면서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조금 밀려들어갔다.
잘못하다가는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했다.
조금 기다렸다가 에미더러 병원에 데려가서 꺼내 내라고 할 참이다.
잠시 후에 에미가 와서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래도 나는 걱정이 돼서 결과를 알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내가 보낸 문자는 보았는지 어땠는지 다음 날이 되도록 기별이 없다.
별일이야 있었겠느냐 만은 오후에 손주를 픽업하면서 어제 병원에서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았다.
할아버지가 했던 대로 핀세트로 집어냈단다.
그럴 테지 그까짓 플라스틱 조각이 뭐 대단한 거라고 …….

손주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하다가 플라스틱이 귓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니? 니가 교실 바닥에서 뒹굴다가
들어갔냐? 아니면 장난으로 집어넣어보다가 그만 쏙 들어간 거냐?“
손주는 모른다고 한다.
“모르다니 자기 귓속으로 플라스틱이 들어가는 것도 몰라?”
놀다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른단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네가 모르겠다니,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니가 모를 리가 있겠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다 알면서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모른다고 하겠지 생각했다.
하기야 동물이라면 숨기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나. 다 드러내놓고 사는 마당에.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무엇인가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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