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3일 전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길로이에 거주하는
66세 개리 영 노인이 코로나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수일 만에 죽어가던 상황을 딸이
멀큐리 신문기자에게 기술한 내용이다.
딸은 아버지가 의료진의 판단 미스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 매일
지역 사회를 달궜던 사건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환자들은 혼자 죽는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족은 창밖에서 지켜보고, 포옹은 생략된다.
멀리서 사는 친척들은 오지 않고, 장례식은 연기된다.
10개월 전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쉬고 암으로 돌아가실 때, 아버지와 오빠,
우리 모두 병원 침대를 에워싸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아가시는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했겠나?
어제, 격리 병동에서 아버지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숨지자 나와 오빠는 유리문 밖 복도에
서서 푸른색 보호장비와 플라스틱 얼굴 보호막을 착용한 의료진이 마침내 심장 모니터를
끄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딸 스테이시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게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내 버렸어. 아빠는 외로움을 느끼는 걸 원치 않았거든.
아빠는 너무 외로웠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아버지는 66세로 막 은퇴해서 첫 은퇴 연금을 받아 들고 기뻐했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 세인트루이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기침과 두통이 심해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흔한 증상인 열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아빠는 딸에게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틀 후,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동내 의사를 방문했다.
의사는 그를 세인트루이스 병원 응급실로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호흡곤란을 겪었다.
곧바로 입원시키고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받았고 격리되었다.
그 후로는 가족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양성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시카고와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다섯 자녀는 처음 듣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20년 전에 당뇨와 인후암에 걸렸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난 건장한 사람이었으므로
모두 극복하고 씩씩하게 지냈다. 아버지가 죽기 30분 전에 아빠와 통화했을 때, 아버지는
여전히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는 진정제를 맞고 간호사가 그의 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버지는 낙관적이었고 마음이 가벼워 보이려고 애썼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아빠가 건강해지는 걸 보고 싶어요. 우리는 아빠를 크게 안아주고 아빠의 재치
있는 농담을 듣고 싶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와도 악수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모두에게 “좋은 아침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오빠가 말했다.
“아버지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재치 있는 농담도 하고 멍청한 농담도 좋아했어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짓곤 했죠. 우리 아빠는 그저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온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해요.”
오빠는 아버지를 회상했다.
“샌호세에서 살다가 멀리 캠벨로 이사한다고 말했더니 아버지는 내가 떠나는 게 섭섭해서
20분 정도 나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 거예요, 나는 할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이 10분밖에
안 남았어”라고 말했죠.“
내가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처음 방문하면서 아빠의 슬리퍼와 면도기를 가져갔지만
간호사에게 건네야 했다. 아버지는 이미 단단한 문이 잠긴 방에 고립되어 있었고,
아빠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빠는 중환자실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옮겨졌고, 방에는 유리문이 겹으로 닫혀
있었다.
첫 번째 문 뒤에서 의료진은 얼굴 보호막과 보호장비로 바꿔 입었다.
두 번째 문 뒤에는 환자가 있었다. 그때까지 아빠는 산소호흡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에서 인공호흡기로 교체되기 직전 아빠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말로 했겠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문자로 보냈다. “무서워”
아빠가 돌아가시기 사흘 전인 토요일, 나와 남편은 중환자실의 긴 복도를 걸어 내려가
두 개의 유리문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아빠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약 20피트 떨어진 복도에서 나는 아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수화로 우리 가족만의 ‘사랑해’라는 표시를 그려 보였다.
그것은 아빠가 흰색 닛산 세단을 타고 외출할 때마다 규칙적으로 하던 가족 사인이었다.
화요일에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단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종말’이 아니냐고 간청했다.
그들은 내 이마에 체온을 스캔했고 들여보냈다.
유리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와 의료진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았다.
“아빠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아빠 곁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어요.”
“엄마처럼 마지막 숨을 쉬는 아빠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게 너무 슬펐어요.”
멀리서 유리 너머로 심장 모니터가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