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 휴대전화를 갖고 있고, 모두가 휴대전화 보느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휴대전화 때문에 각종 사고가 빈발한다. 휴대전화를 보면서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느니, 맨홀에 빠졌다는 따위의 뉴스는 뉴스도 아니다.
휴대전화 보느라고 목 디스크가 생겼다느니, 시력을 잃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커피숍에 가 봐도 혼자나 둘이 앉아 있는 사람은 여지없이 휴대전화 들여다보고 있다.
공원에 가 봐도 심지어 등산해도 산 정상에서 휴대전화 잘 터지는지 확인이라도 해
보려는 투로 휴대전화 화면에 나이키 로고를 그린다.
휴대전화 유행은 끝났고, 없이는 생활을 지탱해 나가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나도 휴대전화에 중독되다시피 셀폰을 들고 다닌다.
꼭 받아야만 하는 전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들고 다녀야만 하는 필수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휴대전화에 들어 있는 기능이 나를 바보로 만들어서 바보는 어쩔 수 없이 안내자에게
끌려다니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휴대전화를 두드려보면 알 수 있다.
휴대전화에 만보기가 있고, 길 안내도 해 주고, 생판 처음 보는 식물도 휴대전화를 드려대면
그 꽃의 이름부터 모든 인포메이션이 다 나온다. 이메일도 열어볼 수 있다.
구글로 들어가서 통역도, 번역도,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준다.
길을 가다가 저 집에서 딸의 고등학교 동창이 살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구글에 집 번지를 넣고 두드리면 이 집은 재작년에 팔렸고 방이 몇 개에 화장실이 몇 개라는 둥,
가격은 얼마에 팔렸다는 온갖 정보가 다 뜬다.
내가 알고 싶은 걸 휴대전화가 다 말해주니 어찌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휴대전화로 건강검진도 알아보고, 책도 읽고, 바둑도 둔다.
지금은 사라지고만 옐로페이지 역할을 휴대전화가 대신하는 세상이다.
들고 다닌다고 해서 맨 날 전화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세상에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시간 빼앗아가면서 전화 걸면 욕먹는 시대다.
전화는 남아도는 시간에 맞춰서 걸어야 한다.
소통은 거의 다 문자로 오가는데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소통한다.
국제전화도 공짜다. 옛말에 공짜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했다.
거저 그것도 영상으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통화도 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이다.
내가 은퇴하고 보니 지인이며 동창들은 이미 다 은퇴했더라.
모두 셀폰으로 연락하며 살면서 웬만한 소식은 꿰뚫고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심지어 친구가 점심에 누구하고 뭘 먹었는지도 자세히 알게 된다.
뭐 그따위 것까지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고 하겠지만,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
서로 이야기하고 웃고 지내는 거, 뭐 그런 거지.
지금 젊은이들은 집전화는 없고 셀폰만 가지고 산다. 젊은이들만 아니라 집을 이사해본
사람들은 구태여 집전화를 고집하지 않는다. 집전화가 거의 쓸모없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유명한 옐로페이지(집전화번호부)가 없어지고 말았겠는가? 예로페이지에는
전화번호보다 광고가 더 많았다. 무엇이든 필요하면 옐로페이지를 들춰보면 다 있었다.
옐로페이지가 문제를 해결해 주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은 누구도 디지털 혁명을 거역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휴대전화 속에는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많다. 시각, 청각을 자극하는 놀이가 있고 TV며
동영상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마 죽을 때까지 보아도 못 다 볼만큼 무궁무진이다.
휴대전화에는 세대차별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고, 빈부 격차도 없다.
많지는 않아도 이렇게 훌륭한 디지털 문명을 거역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시대든지 돌연변이는 있기 마련. 내게도 시대를 거슬러 사는 친구가 딱 한명 있다.
친구는 집전화 하나로 온갖 세상을 다 버티고 산다. 세상 바뀌는 걸 원치 않아서도 아니요,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냥저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주변 이웃들은 모두 셀폰으로 무장하고 행복하게 지내는데 친구는 그런 거 부럽지 않단다.
그러면서 답답한 것도 없고, 전화기 가지고 노는 것도 보기 싫단다.
언뜻 듣기에 거침없는 인생살이 같기도 하고, 인생에 도가 튼 것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은 생소한 디지털 문명에 겁먹고 주눅 들어서 잘못하다가는 위신 깎기고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써먹거나 먹히지도 않는 권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역 시절과 달라서 노인이 되면 아는 사람들로부터 연락도 끊기고 고립되기 쉽다.
소통에는 대면, 전화, 우편이 있겠는데 노인은 대면 소통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만만한 게 전화인데 디지털 전화는 발달에 발달을 거듭해서 셀폰 하나만 가지고도
온종일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다. 디지털 문명 때문에 우편물은 거의 없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셀폰을 거부하다니……
여러 번, 그것도 수년간 셀폰의 이점을 이야기해 주면서 설득하다가 이제는 그만 손들고
말았다. 처음엔 고집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지내면서 보니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친구에게 ‘결정 장애 증후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정 장애 증후군’은 ‘햄릿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증세다.
이때 누가 1%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면 쉽게 결정을 내리게 된다.
친구에게 딸이나 아내가 있다면 옆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쉽게 먹혀들어 갈 것인데
불행하게도 혼자 살다 보니 결정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세상 이치 때문에 셀폰을 지니면 체면이나 위신 따위는
버려야 한다.
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본인도 안 그렇다고 하면서, 실은, 속으론 혼자서 목에
누러 붙은 힘을 빼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시대를 거슬러 사는 사람이 자신이 거슬러 사는지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다 안다면서 실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왜 내가 답답해하지?
9살 먹은 내 손주도, 90세 되신 이종사촌 누님들도 휴대전화는 다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휴대전화 소지를 거부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어서 그렇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