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아름다워

IMG_200-39 (3)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이라 그런지 날씨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게 밖에 나가
놀러 다니기에 딱 좋은 기온이다.
텃밭의 호박에 아직도 호박꽃이 피기는 한다만 보잘것없이 초라한 노란 꽃이 자질구레하다.
잎과 줄기가 누렇게 시든 후에 피는 꽃이라는 게 저것도 호박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제 딴에는 호박씨라도 남기려고 작은 호박을 밑동에 달고 안간힘을 쓴다.
마치 팔순 노인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미련 없이 호박넝쿨을 걷어 내려다가도 작으나마 꽃을 피우는 모습이 가련해서 그냥 보고만 있다.

그런가 하면 가지는 제철을 다시 맞았다.
3월에 심어 5, 6월 한차례 수확을 걷어서 이제 가지 시즌이 끝났나보다 하고 버려두었는데
뜻밖에도 8월로 접어들면서 가지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봄에는 양은 냄비 뚜껑만큼 커다란 잎으로 무성하던 가지 나무가 가을로 접어들면서
잎이 겨우 여자 손바닥 반만큼의 사이즈로 작아졌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가지 잎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한해살이 식물인 가지를 가지 나무라고 해야 할지, 가장이나 줄기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리만치 밑동이 실하고 굵직한 게 나무가도 불러도 될 것 같다.
가지 나무가 굵기만 한 게 아니라 꽃이 봄철보다 더 많이 피었고 가지도 더 많이 달린다.
달린 가지 역시 제대로 커 간다. 가지의 진짜 시즌은 가을인가 할 정도다.

가지가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어둠을 먹고, 밤낮 가리지 않고 바람을 먹는가 보다.
아기가 기지개 켤 적마다 키가 큰다면, 가지는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기지개를 켜나보다.
자고 일어나 아침에 나가 보면 눈에 띄게 자랐다. 간밤에 5cm는 자란 것 같다.
눈짐작으로 내일이면 따도 되겠구나 하고 점찍어놓으면 짐작했던 것보다 더 자라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호박꽃이나 가지 꽃은 줄기에서 새로 뻗어 나온 곁가지에서만 핀다는
사실이다.
헌 가장이나 줄기는 실하고 늠름해서 무거운 과실을 매달고 있어도 끄떡없을 것 같건만,
꽃은 헌 가장이를 지나 가늘고 여린 새로 나온 곁가지에서만 핀다.

잘 익은 가지는 보라색이 짙다 못해 검은색이 돈다.
생기기도 점잖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반질반질하고 반짝반짝 빛난다.
마치 에메랄드 보석 같다.
군살 하나 없이 미끈하고 날씬한 게 깔끔한 모자에 정복으로 차려입은 여경 같아서
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일본 요코하마 사찰에 갔을 때다.
사찰 정문까지는 한참 걸어서 가게 되어 있는데 길가에서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지를

얼음물에 담가놓고 파는 걸 보았다.
한국에서도 나 어렸을 때는 가지를 날로 먹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러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날 가지를 상품화해 놓고 팔고 있었다.
얼음물에 담가놓았으니 시원할 것이다. 생가지를 먹는 사람들이 꽤 있어 보였다.

가지를 영어로는 Japanese Egg Plant라고 한다. 왜 Egg Plant 앞에 Japanese가 붙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근대화하면서 일본인들이 선수 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지를 왜 Egg Plant(달걀 식물)라고 할까?
원래 가지는 달걀처럼 생겼었다. 수천 년을 두고 개종하다 보니 지금의 길쭉한 모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달걀 모양의 가지를 즐겨 먹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특별히 가지를 좋아해서 가지에 관한 설화도 많다.
새해 첫날 가지 꿈을 꾸면 길하다는 속설이 있는가 하면, ‘가을 가지는 며느리에게 먹이지
말라’라는 속담도 있다. 가을 가지는 다른 때보다 유난히 맛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런던의 젠틀맨 같이 미끈하게 잘생긴 가지를
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딸까 말까 망설이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우면서도 몇 개 따 들고 내일 아침 갖은양념에 무쳐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행복하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