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넘어가는 일요일치고는 기온이 꽤 높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지내면서 털옷으로 무장한 루시는 얼마나 더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루시도 알아서 맨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다.
폭신한 제 자리보다 맨 마루가 시원해서 그럴게다.
루시가 하룻밤을 무사히 지냈다.
세상에 개의 병간호를 하다니, 그것도 운명을 지켜보는 호스피스 간호를 말이다.
자연수명을 다하는 루시는 곱게 늙은 셈이다.
지금 세상에 특별한 병 없이 자연수명을 다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짓지 못하는 것이야 늙었으니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죽어가면서 보고, 듣고, 짖으면서 주인을 얼마나
괴롭히겠는가?
죽기 싫어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본다면?
도와주지도 못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착하게도 루시는 기능이 다 사라졌으니 온종일 조용히 드러누워 있기만 한다. 밤이나 낮이나.
그래도 이게 어디냐.
사람도 아닌 개가 죽겠다고 속을 썩인다면 그 꼴을 어찌 보겠는가.
루시도 알아서 영원히 떠나는데 미련 갖지 말라고 이것저것 정리해 나가는 걸 보면
참 기특하다.
끙끙 앓는 소리 듣지 말라고 소리도 잃었고, 주인이 하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귀도 들리지
않고, 정겨웠던 집이며 사람들 보지 말라고 눈이 멀었으니 루시는 정말 주인에게 충직하고,
스스로도 복 받은 개다.
개의 수명이 사람보다 짧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개의 수명이 사람보다 길다면, 개의 생애에서 새 주인을 몇 차례 바꿔야 할 것이다.
개는 주인에게 충직한 동물인데 주인을 바꿔가면서 충직할 수는 없는 거다.
주인을 바꿔가면서 충직하다면 그는 변절자이거나 배신자여야만 한다.
변절자나 배신자는 충직한 개가 될 수 없다.
고로 개의 수명은 사람보다 짧아야 한다.
얼마 전에 미국인 집에 들렀다가 그 집 개를 보고 놀랐다.
덩치 큰 개가 리빙룸 한복판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앞다리 팔꿈치에 커다란 상처가 고대로 보이는데 시뻘건 살이 노출되어 있어서 보기에도
끔찍했다. 어찌 된 일인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서라는 종류의 개인데 얼굴이 사납게 생겼고 덩치가 크고, 털이 없어서 갈색 잔털로
반지르르했다.
주인이 그러는 데 개에게 스트로크(stroke)가 왔단다. 중풍을 맞아서 일어서지도 못한단다.
처음 듣는 소리라 개도 중풍이 오나 했다.
이번이 두 번째란다. 스트로크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다쳐서 난 상처라고 했다.
자리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개를 보살피느라고 주인이 고생이 많아 보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복서를 병간호 하느라고 힘들어하는 부부를 보고 딱 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큰조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는 걸 달래주기 위해 개를 구해 준 일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일랜드 세터였는데 암놈이어서 이름을 ‘미나’라고 지어주었다.
집 안에서 가족을 하나 잃었지만 다른 가족이 하나 생겼기에 분명히 잃은 구석이 채워진 것 같았다.
아일랜드 세터가 그렇게 큰 개인 줄도 모르고 구해 주었는데 기르다 보니 덩치가 보통이
아니다.
‘미나’는 천방지축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내 보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목줄이라도 풀리면 멀리 도망가면서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다.
‘미나’는 주인 의식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도 좋아서 꼬리를 흔들었다.
밖에 못나가게 했더니 풍성한 갈색 털에 큰 덩치를 가지고 집안에서 들고 뛴다.
어수선해서 정신이 없었다.
조카애는 ‘미나’에게 흠뻑 빠져들어 ‘미나’ 없이는 못 살 지경에 이르렀고 생활의 중심에는
‘미나’가 있었다. ‘미나’와 함께 일어났고, 학교에 따라가겠다는 ‘미나’를 떼어놓느라고 법석을 떨었고,
학교에 다녀오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엄마처럼 끼어 안고 스킨십을 나눴다.
동물이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면 유대관계가 사람보다 더 깊어진다.
한 칠팔 년 정이 들었나 보다. 어느 날 ‘미나’가 먹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개는 자신의 고통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암이라고 했다. 암이 온몸에 퍼져서 고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조카는 눈이 빨개지면서 금세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거냐. 떼어버리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거다.
정 떼는 게 무서워서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게 되었다.
그게 언제쩍 이야기냐. 조카는 이미 중년이 넘었는데, 결혼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애가 없다.
애가 없어서 부부가 쓸쓸히 살지만, 애완동물은 기르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은퇴할 것이고 은퇴하면 유타주에 가서 살겠다면서 집도 보아놓고 은퇴 준비를
착실히 하면서도 개 기르는 걸 무서워한다.
정이 무언지…….
그런 거 보면 루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지가 알아서 다 정리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정을 떼느라고 은근히 주인을 괴롭힌다. 눈멀고, 귀먹고, 소리 못 내고, 이제 주인이 보살펴
주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다. 보살펴 줄 것도 없다. 그저 밤낮 누워서 생명이 소진되기를
기다린다.
어느 날 등잔에 기름이 다 없어지면 불은 스스로 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