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아침에 청바지를 갈아입으면서 생각이 났다.
청바지를 오래 입다 보니 바지가 바랠 대로 바래버려 색이 허옇게 변했다.
해지거나 낡은 것은 아닌데 색깔이 흐려 터지다 보니 청바지가 청바지 같지 않다.
마치 머리가 하얘진 내 얼굴을 내가 보아도 나 같지 않은 것처럼 바래서 하얘진 청바지를
입으면서 청바지가 청바지 같지 않다.
청바지도 늙으면 하얘지는 구나……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청바지를 입으면 몸에 착 달라붙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마치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고 누구라도 나를 멋지게 보아주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청바지를 입으면 불량청소년으로 보고 어딘가 착실한 아이처럼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아무리 내가 좋아서 입었다 해도 청바지를 입고 시내에
나다니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내 자아보다는 남들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에 길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남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착한 소년, 말 잘 듣는 소년이 돼야 한다는 암묵적
기대에서였다. 그렇다고 그 누구에게서 얻어먹는 것도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작으나마 알 수 없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 일었다.
반항 표출 방법의 하나가 청바지를 입는 것이다.
집에서나마 청바지를 입고 불량청소년처럼 폼을 잡아본다.
그때 히트 친 영화 ‘맨발의 청춘’을 몰래 숨어 들어가 보고 의리라는 걸 우러러보며
울분을 사기던 그런 시절이었다.
고령인 지금도 나는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집에서는 늘 청바지를 입고 산다. 고령이다 보니 매일 집에서 소일하는 게 일과다.
그러다 보면 한 달 내내 청바지만 입는다. 나는 청바지 외에는 입을만한 바지가 없다.
청바지도 종류가 많아서 젊어서는 이것저것 다 입어보았다.
한때는 리바이스를 입었는데 허리가 높아서 허리에서 조금만 흘러내려도 바짓가랑이가
질질 끌린다. 리스, 와그너 등 여러 브랜드를 입다가 지금은 러슬러로 고정되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유행도 없어서 한 번 사면 죽을 때까지 입어도 된다.
여러 벌 사 놓고 갈아입다 보면 바지는 멀쩡하지만, 색이 바래서 허연 게 청바지 같지 않아
버린 바지도 여럿이다.
희한한 것은 미국에서 청바지만 입고 사는 나도 한국에 가면 청바지는 입지 못한다.
어쩌다가 산행을 한다거나 당일 여행을 떠나면 입을까? 집에서는 입지 못한다.
입지 않는 게 아니라 입지 못한다.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고령인 사람이 주책없이 청바지
쪼가리나 입고 다니느냐 하고 쳐다보는 것 같아서다.
왜 이런 마음이 들까?
문화가 달라서 노인이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치 불량 노인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설혹 남들의 눈치를 무시하고 청바지 입는 것을 고수하다 보면 결코 고운 눈빛을 받지
못하리라.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이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는데 구태여 거역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도 분위기 따라가는 게 속 편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동양문화는 알게 모르게 유교나 불교문화에 물들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속은 오랜 문화가 쌓여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미국에 오면 금세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청바지로 갈아입고 돌아서는 순간 십 년은 젊어진 기분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자아를 찾아 살아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나처럼 미국에서 평생을 살다시피 한 사람도 이럴진대 한국에서만 사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아를 찾는 책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다 그래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