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구는 사과’는 이번에 출간한 수필집 ‘참기어려운 하고 싶은 말’ 속에 있는 굴 중의 하나다.
꿈꾸는 사과
고속도로를 한 시간이나 달릴 만큼 먼 곳에 있는 한국 식품점에 사과 사러 간다.
남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과이기에 그 멀리 사과 사러 달려가는가 하겠지만
내게는 먼 길을 달릴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이 사과이고, 종류도 그만큼 다양하다.
미국 식품점에 들어가면 두세 종류 다른 사과를 파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 식품점에서도 레드 디리셔스, 하니 크리슈, 홍로, 후지 등 다양한 사과를 판다.
이 사과 저 사과 먹어보았지만 내 입맛에는 후지 사과가 가장 맛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는 후지 사과만 먹는다. 같은 후지 사과라는 이름이라도 주먹만 한
크기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 훨씬 큰 후지 사과도 있다.
그까짓 사과나 사러 멀리까지 달려가는 이유는 한국 식품점의 후지 사과는 유별나게 크다.
어느 식품점에 가 보아도 이렇게 큰 후지 사과는 보지 못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사과가 나주 배만큼 크다. 큼직하면서도 달고 바삭바삭하다.
식품점 매대에 사과를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았다.
사과가 큼지막한 게 먹음직스럽다. 나는 사과를 그냥 집어서 비닐봉지에 넣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고르고 또 고른다. 먼저 큰 놈으로 고르고, 색깔이 골고루 빨갈수록 좋고,
그다음 둥글고 잘생겨야 한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게 좋겠다 하고 집어보면 내가 집은 건 별로고
그 옆에 있는 사과가 더 실해 보인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사과를 고르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사과를 고른다.
아무 사과나 막 집어넣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고르고 고르기를 반복한다.
어떤 때는 내가 집었다가 놓은 사과를 옆 사람이 집어 든다. 그럴 때면 괜히 좋은 사과
놓친 것 같은 아쉬운 기분이다.
얼마 전에 독일 여행하던 생각이 난다.
어느 관광지였는데 과일 상점이 눈에 띄었다. 사과라도 사서 먹을까 하고 과일 상점을
기웃거렸다. 마침 사과를 잔뜩 쌓아놓았기에 늘 내가 하던 대로 고르려고 사과를 집으려는 순간
주인이 소리를 꽥 지른다. 깜짝 놀라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나 살펴보았다.
주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사과를 고르거나 만지지 말란다. 살 것만 집으란다.
나는 당황했지만, 주인이 만지지 말라니 어쩔 수 없이 눈으로만 고르다가 그냥 맨 위에 있는 사과를
집어 들었던 생각이 난다.
관광객이란 한번 지나가고 마는 손님이다. 단골로 드나드는 손님이 될 수 없다.
쓸데없이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다는 얄팍한 상술이 상점 주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굵은 사과만 고르면서 그때 생각이 나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냥 쌓아놓은 사과를 위에서부터 집어 가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고르고 골라야 하는 건지
명확한 정답을 지금껏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사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과가 집어갈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아주머니가 와서 들었다 놨다 한다.
들었다 놨다 할 때마다 사과는 서로 부닥치고 아프다.
살살 놓았으면 좋으련만 아주머니는 사과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동댕이치다시피 던지기도 한다.
차라리 빨리 팔려 갔으면 좋겠는데 예쁘고 잘생긴 애들만 뽑혀 나간다.
어젠 빨강이하고 예쁜이가 뽑혀 나갔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리 셋이 단짝이었는데 나만 홀로 남았다. 오늘은 어느 아주머니가 나를 괴롭히려나?
솔직히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대우받고 자랐다. 이른 봄에 꽃으로 피었다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사과밭 주인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크라고 동생을 잘라버렸다. 부잣집 외동딸처럼 호강하며 자랐다.
병충해가 접근 못 하게 소독해 주지, 새들이 쪼지 못 하게 쫓아주지 나는 맘 푹 놓고 실컷 먹고 잘 노는 거야.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흰 장갑 낀 손으로 어루만지며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시집보내야 한다는 거야.
깜깜한 상자 속에서 한 잠자고 났더니 이곳 매대에 올라앉아 나를 골라갈 주인을 기다리게 되었지.
기왕이면 마음씨 고운 아주머니에게 뽑혀 갔으면 좋겠어. 깨끗이 씻고 깎아서 모양 있게 썰어놓으면
어린 아들과 딸이 맛있게 먹겠지. 생각만 해도 행복해.
오늘도 아침부터 한 무리 사과들 틈에 끼어 집어갈 주인을 기다리지만 내 마음은 외로움으로 가득하다.
어서 행복한 가정으로 가게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