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면 좁디좁은 공간에 사람이 많을 것이고 바이러스 침투를 막는 방법은
오로지 마스크밖에 없다. 그것도 장시간 동안.
기왕에 쓰는 마스크 효능이 탁월한 KF94로 쓰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KF94 마스크는 숨쉬기가 거북하리만치 정교해서 허튼 공기 한 방울 새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타잇 하다.
기내에 승객은 많지 않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마스크를 잠시도 벗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승객 모두가 알고 있다.
앞줄 옆좌석 남성 승객이 마스크를 코밑으로 내려쓰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마스크를 고쳐 써달라는 주문에 승객은 끽소리 못하고 바로 고쳐 썼다.
나 역시 숨쉬기가 시원치 못해 갑갑했지만, 샌프란시스코까지는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시간만 참으면 마스크에서 해방된다는 희망이 그나마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마스크 쓰기보다 싫은 것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월남 중늙은이 때문이었다.
보잉 A330-300 기종의 이코노미석 칸 좌석 배치는 횡대로 창가에 2석, 통로, 중간에 4석,
통로, 창가에 2석으로 되어있다.
나는 창가 쪽 통로석에 앉아 있고 월남 중늙은이는 통로 건너 중간 4석을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월남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신발을 벗었다.
슬리퍼로 바꿔 신으려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양말까지 벗어 던지더니 맨발로 지내겠다는 심산이다.
아예 저녁은 먹고 왔는지 기내식도 거절하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좌석 4개를 차지하고 누웠으니 침대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필이면 맨발을 내 쪽으로 뻗고 있어서 바로 내 옆에 냄새나는 늙은이의 발이 있다는 게
신경이 쓰였다. 늙으면 뻔뻔스러워지는 건 맞지만 예의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보기에 흉했다.
저녁 식사를 나눠줘서 받아먹기는 했다만 드러누워 맨발을 내게 들여 민 사람과 함께하는
식사가 과히 기분 좋은 저녁은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생각난다.
자기 당 소속 의원을 많이 당선시키려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위인들을 마구 추천해서
국회의원직을 나눠주었다.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국회의원들을 대동했다. 물론 대통령 전용기였지만 무식한 의원들이
기내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활보하고 다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대한항공이 ‘스카이트랙스’ 평가에서 오성(5 star)을 받았다는 혜택이 여기저기서 효과를
드러냈다.
대한항공을 타고 온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대우받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까다롭게 굴던 세관원들이 모두 숨어버렸다.
그냥 무사통과다. 다른 나라에서 온 승객들에게도 그러는가 살펴보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대한항공보다 앞서 도착한 타이완 승객들은 철저히 조사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대한항공을 타고 온 한국인들에게는 미리 작성해온 세관 신고서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코비드 검사 확인서가 없으면 탑승을 거부하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만들었던
코비드 19 검사 확인서도 보자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들고 나와버렸다.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통과시켜주는 까닭은 한국 인천공항에서 철두철미하게
검사하기 때문에 미국 공항에서는 믿고 검사할 게 없다는 식이다.
수없이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드나들면서 지금처럼 거저먹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무엇이든 열심히 잘해서 인정받으면 매사 수월하게 풀리고 대우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마스크에서 해방되니 살 것 같다. 날아갈 것 같다.
기분 좋은 세상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