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연속 소설 ‘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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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나 지금이나 태양은 온 천지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햇살이 차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현아와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고속도로에 올라와 남쪽으로 향했다.

약속했던 대로 현아를 태우고 내가 사는 집을 보여 주러 가는 길이었다.

서니베일은 내가 부동산 중개업을 열고 칠 년째 다져온 지역이다. 실리콘밸리를 끼고

있어서 직장을 따라서 이동해 오는 인구가 많다. 당연히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으로

집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세일즈맨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을 여덟 명이나 거느린

중견 중개업자로 성장했다. 마침 호황기에 접어든 부동산 경기가 호응해 준 것이 행운이기도 했지만,

중국인 부자들이 몰려와 부동산에 투자한 것도 한몫했다.

특별히 중국인 담당 세일즈맨도 따로 두고 있다.

지난 삶 속에서 내 눈에는 돈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동안 집을 샀다가 되팔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돈이 남는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팔아치웠다. 헌 집을 사서 새집같이 수리한 다음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놓고 들어가

살면서 바이어들이 홀딱 반하도록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구 하나하나를 규격에

맞게 잘 배치해 놓는 것은 기본이다. 어떤 중국인 바이어는 집만 아니라 가구까지 몽땅

사겠다고 나섰다.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팔겠다는 가격에 웃돈을 얹어 주면서

경쟁적으로 사겠다고 덤벼들었다. 은행 이자가 4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게 원인이겠지만,

지난 삼 년은 미국 부동산 경기가 과열 현상을 보였다. 전국 집값이 평균 35% 오른 데

비해서 실리콘 밸리는 90%가 올랐으면서도 집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내가 돈벌이에 매달린 데는 현아 엄마가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태도도 한몫했다.

일주일에 칠일을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뛰어다녔다. 은행 융자로 집을 사서 집세를 받아

은행 월부 상환금으로 돌려놓기는 했지만, 내 이름으로 등기된 집만도 다섯 채나 된다.

일에 푹 빠져 성취감과 만족감에 도취해 살았다.

 

BMW 600에 현아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고 즐거웠다.

모빌 폰으로 20분 안에 도착할 것이니 집 안의 공기며 온도를 조절해 놓고 커피 끓일 준비를 지시했다.

집에서 상근하는 미셸에게 한 전화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현아가 물었다.

누구와 같이 살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고 싶은 모양이다. 중성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현아가 곁눈질로

노려보는 게, 동성애자인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현아의 의구심이 더 깊어지기 전에 미셸은

가정부로 일하는 로봇이라고 말해 주었다.

미셸은 혼다 아시오 전자 회사에 특별 주문 제작한 스마트 인공지능 로봇이다.

바퀴가 여섯 개 달린 둥근 스탠드에 두 다리로 서서 자유로이 이동해 다닌다.

수평 운동 관절을 조합한 수평 다관절인 동시에 사람의 팔과 유사한 동작을 수행하는

수직 다관절로 두 팔의 움직임은 실제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얼굴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 머리카락은 없고 동그란 두 눈과 작은 스피커가 입 대신 있다.

양쪽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구멍이 나 있고 가슴에는 스마트폰 모니터가 달려있어서

미셸이 기억해야 할 일과 수행해야 할 일을 안내한다.

집 안 청소는 물론이고 설거지며 그릇 정돈도 잘한다. 자고 난 침대 정리며 벗어 던진

옷가지를 어디에다가 걸어 놓아야 하는지 다 안다. 기억력이 특출해서 주인이 입력시켜놓은 대로 임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건 없나 살펴보기도 한다.

미셸이 좋은 이유는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정 없이 일에만 충실하고 말대꾸가

없다. 화를 내지도 않고 침울해하지도 않는다. 말썽을 부리지 않는 것은 미셸과 살기를

잘했다고 여기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미셸은 먹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배설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집은 잘 정돈된 모델하우스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셸이 먼저 반겼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목소리에 기계 소리를 깔고 있어서 그렇지, 어휘나 발음은 또렷하다.

그래, 커피는 준비돼 있고?

, 다 준비됐어요.

현아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미셸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정말 사람처럼 말한다며 놀라워했다.

이것도 세일즈 전략 중 하나다. 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깜짝 놀랄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탁 트인 거실 한편에는 소파가 있고 램프 테이블을 중심으로 기역 자로 구부러져 러브

시트가 놓여있다. 75인치 QLED TV에 최신형 DVD 플레이어가 리모트 컨트롤로 작동한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면 정면의 커튼이 무대 열리듯 갈라지면서 천천히 열린다.

큰 유리 네 짝 자리 슬라이딩 글래스도어를 통해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숲속의 궁전 같은 집이다.

미셸이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큰집이다. 마스터 침실에는

이탈리아제 킹사이즈 베드에 루이뷔통 베드 스프레드로 커버가 되어 있고 침대 위에는 큰 것,

작은 것 해서 베개가 열 개나 됐다. 깨끗하고 정돈된 베드룸이 마치 왕자님 침실 같아

보였다.

현아는 이것이 비즈니스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바이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들이 홀딱 반하게끔 늘 꾸며놓고 있는 것도 세일즈 전략 중의 하나다.

오늘은 현아가 마치 바이어처럼 세일즈 작전에 넘어가고 말았다.

현아는 내가 왜 결혼하지 않는지 알고 싶어 했다. 여자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결혼하기에는

겁이 난다고 말해 주었다. 한 번 실패하고 났더니 결혼은 하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현아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다시 만났다.

강렬한 오후 햇살이 클록 바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현아는 심오한 것도,

관능적인 것도 같은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목소리에 콧바람도 섞여 있다.

우리 다시 합치면 안 될까?

예쁜 미소를 지으며 기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겁먹을 거 없어. 새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시 합치자는 건데, .

나는 선뜻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침묵이 금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표정을 읽는 데 능숙한 현아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네주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생각해 보고 전화해…….

현아는 결국 자기가 낳은 아이인 스티브는 보지도 않고 떠났다.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를 낳은 친엄마도 어쩌면 현아 같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성이라고 다 같은 모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파하며 사랑을 아끼지 않는 모성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모성도 있다.

하기야 자기 자식만 감싸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모성일진대,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치 둥지 안에서 바꿔치기한 뻐꾸기 새끼에게 모성을 쏟아붓는 오목눈이처럼…….

 

현아가 떠나고 열흘쯤 되었을 것이다. 새벽 5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잠결에 수화기를 들었다.

나 현안데, 자는 중이야?

서울은 저녁 9시란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은 생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난 널 보고 반했단 말이야. 온통 네 생각으로 잠이 안 와. 그래서 오늘 내가 한잔했거든? 이해해 줘라.

준비되는 대로 너한테 갈 거야. 가도 되지? 왜 대답이 없어? 예스 맞지?

현아는 술주정처럼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댔다. 지난 칠 년 사이에 현아가 바뀐 것은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과 술주정도 부린다는 것이다.

그래그래, 알았어. 자고 내일 통화하자.

, 전화 끊지 마. , 내가 좋은 거야? 그거만 말해.

좋고, 싫고가 어디 있어. 우린 친군데. 그러지 말고 정신 들거든 통화하자.

그러니까 넌 내가 싫다 이거지?

싫긴 왜 싫어.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 알았다. 그럼 좋다는 말이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떨떠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도 전화는 매일 걸려 왔다.

새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다시 합치자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것도 아니라는 현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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