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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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코로나 시대가 돼서 이발소도 예약하고 오란다.

이발소에 앉아서 노닥이는 것도 방역 위반이 돼서 예약은 필수가 되고 말았다.

내가 단골로 다니는 최 이발소는 살림집 뒷마당 구석에 조그마하게 아이들 놀이방처럼

지어놓고 이발소로 활용하고 있다.

최 씨도 열심히 돈 벌어야 할 나이가 지났으므로 월요일하고 목요일은 쉰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월요일에 전화를 걸면서 머리 깎느냐고 물어보았다.

내일 오라고 하기에 오전 11시로 예약을 해놓았다.

예약 시간에 맞춰 이발소에 갔는데 떡하니 어떤 아이를 앉으라고 하면서 나보다 먼저

깎아 준다. 하는 수 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머리를 깎았다.

이발료를 지불하고 나오려는데 이발사 최 씨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미안했던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예약하고 오세요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최 씨가 나의 예약 시간을 깜빡한 것 같았다.

내가 어제 예약했잖아요?”

?”

최 씨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랬나?”

혼자 중얼대면서 우물대더니 멋쩍은 미소를 띤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갔다.

 

1990년대, 아날로그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수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휴대폰을 지니고 다니다가 기억해 내야 할 것이 있으면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기억해 두고 싶은 것은 미리 아내에게 전화해서

기억해 두라고 일러두고 필요할 때면 다시 물어서 기억을 복원하곤 했다.

다시 말하면 아내의 두뇌는 지금의 컴퓨터 역할을 감당했기에 나는 일찍부터 컴퓨터를

활용한 셈이다.

휴대폰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모든 게 변했다.

수첩도 필요 없고, 컴퓨터 같은 아내의 두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됐다.

무엇이든 휴대폰에다가 대고 두들겨 보면 다 나왔다.

모든 생활 정보가 들어 있어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도 없이 휴대폰만 두드리면 문제를

짚어주고 해결해 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설혹 메모해야 할 일이라도 생기면 휴대폰의 노트팻을 열고 적어놓으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화 연락을 취해야만 했던 바쁜 시절도 다 가버리고, 집에서 놀고먹는 나이가 되었다.

유능한 비서 휴대폰도 써먹을 이유가 사라진 지금, 수첩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세상일수록 수첩은 흔해서 연초만 되면 아들이 삼성에서 나온 수첩을 건네준다.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수첩은 두껍기도 하지만 내용이 충실해서 작년, 금년, 내년

달력이 있는가 하면 달력에 일일이 메모할 수 있게끔 칸이 잘 짜였기도 하고,

나머지 두꺼운 노트는 웬만한 소설을 한 권 써도 되리만치 페이지 수가 충분했다.

거기에다가 경조문, 수례 서식도 있고 심지어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도 그려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수첩이 있다 한들 내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냥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고만 있다.

 

아내는 이발료 건네주기가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무슨 머리 깎을 날이 그리 빨리

돌아오느냐고 투덜댄다.

이발소에 전화를 걸어서 예약했다. 예약 전화는 늘 이발사 아내가 받았다.

보나 마나 이발사 아내는 예약한 사람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는 게 아니고 머리로

기억할 것이다. 기억이라고 하는 게 기록과는 달라서 생뚱맞은 결과를 펼쳐 보이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가 있다.

분명히 나는 이렇게 기억하는데 상대는 아니라고 우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외상 술값을 갚았는데 술집 주인은 안 받았다고 할 때다.

싸울 수도 없고, 싸워봤자 결말이 나는 것도 아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번 갚을 때도 있었다.

 

이발사 최 씨의 집 앞마당, 뒷마당은 텃밭이다. 나는 최 씨 부부가 일궈놓은 텃밭을 구경하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텃밭을 훑어보다가 상추 따는 이발사 아내에게 웃으면서 삼성 수첩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예약은 수첩에 적어놓으시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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