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는 지인들이 단풍 보러 설악산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가 보았던 설악산이 떠오른다.
단풍 구경하면 설악산이다.
그만큼 설악산의 단풍은 유명세를 떨친다.
설악산에서 단풍 볼만한 골짜기가 한두 군데더냐.
다 돌아다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을이면 배낭을 메고 쏘다니던 때도 있었다.
그때도 10월 말이었다. 백담사에 가려고 무작정 혼자서 버스에 올랐다.
백담계곡 입구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음식점이 많았고 음식점마다 황태 전문집이었다. 황태 산지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집집마다 장작불 태우는 냄새가 은은한 게 향기로웠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황태정식 한 상에 5,500원이었는데 황태구이 한 마리, 황태국,
명란 두 쪽, 비지찌개, 각종 산나물 그리고 또……
반찬이 너무 많아서 못다 셀 정도였다. 강원도 인심에 반할 지경이었다.
평상시에는 관광객이 없다가 이번 주하고 다음 주에만 복작댄단다.
셔틀버스 타는 곳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셔틀버스를 타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셔틀버스가 있는 줄도 몰랐다.
부처님을 뵈러 가는 데 셔틀버스를 탄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고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더냐.
백담계곡을 따라 걸었다.
단풍잎이 곱게 물들었는데 셔틀버스 타고 가면서 어떻게 감상하겠다는 건지……
휙 휙 지나쳐버리고 나서 남은 건 ‘나 거기 갔다 왔어’ 뿐이겠지.
계곡으로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정취가 일품이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어서 걸어가는 나 자신이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빨간 단풍이 여기저기서 자기 좀 봐달라고 아기가 색종이 흔들듯 손짓하고 있었다.
진짜 고운 단풍은 나도 모르게 걷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걷는 내내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또 어떻고?
어느 오케스트라가 바위에 부딪치며 내는 물소리를 흉내인들 내겠는가?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소리가 있는가 하면 고요하고 잔잔한 리듬도 있다.
소나 담에 떨어지는 웅장한 소리는 마음을 두근거리게도 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소리로만 나를 즐겁게 하는 게 아니었다.
험준한 바위를 갈고 닦아내어 반들반들한 달걀 껍데기처럼 만들었다.
아이스크림 통에서 한 스쿱 퍼낸 자리처럼 움푹 파인 바위 웅덩이에 녹색 물이 연못을
이루었다. 연못을 이룬 거대한 통짜 바위에 흰색 줄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보이지 않는 깊숙한 바위 속에까지 아름다움을 숨겨두신 창조주는 분명 고운 마음을 지닌
분이 틀림없어 보였다.
걸어서 내려오는 사람은 있어도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므로 관광객들은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하지만 셔틀버스를 타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계곡의 경관이 너무나 아까웠다.
단풍은 얼굴 한 번 붉히려고 일 년을 벼르고 나서 이제 겨우 때를 맞이했는데,
기다리는 단풍은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가 오는 길에 피뜩 보고 말겠다니……
단풍으로서는 야속할 것이다.
행락객들이 놓치는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내가 다 안타깝다.
백담사를 보러 간다는 기대에 차서 걸어갈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지
셔틀버스 타고 가서 백담사를 다 둘러본 후에 걸어 내려오면서 계곡을 구경하려면
희망과 기대가 사라진 다음이어서 의욕이 시들해진다.
가을 산 단풍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다고 했다.
설악산 단풍이 내장사나 선운사 단풍보다 아름다운 까닭은 자연산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 단풍이어서 보기에 그윽하다.
더욱 많은 사람이 단풍의 진수를 맛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