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일기예보부터 챙긴다.
뭐, 어디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걷기에 나서려면 기온이 어떤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아침에 반바지에 반소매 러닝셔츠를 입었다.
11월도 중순인데 여름처럼 입다니! 입으면서도 나 자신 신기하다.
기온이 의외로 따스하다. 이번 주 내내 따듯했다.
날이 춥지 않으니 밖에 나가 활동하기 좋고 기지개를 켜고 걸어서 살만하다.
다음 주부터는 기온이 내려간다니 좋은 기온도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놀고먹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나이 또래가 되면 직장에서 은퇴하고
가족들로부터도 밀려나면서 할 일이 없으니 우두커니 시간만 보내기 마련이다.
엊그제는 모처럼 맥도널드에서 친구를 만났다.
팔아주는 것도 없이 친구는 커피나 마시고 나는 거저 주는 물이나 마시면서 노닥였다.
이제쯤은 가야겠다며 시계를 보니 자그마치 4시간이 흘렀다.
그저 마냥 떠들다가 나중에는 이야깃거리가 궁해서 나는 우리 엄마 점치러 가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친구는 젊어서 자기 와이프가 아기를 안고 멀리 비행기 타고 LA까지 가서
점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것도 다 털어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글이랍시고 쓰는 바람에 시간이 아까워서 쪼개가면서 쓴다.
글쓰기는 내게 있어서 대학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천성이 게을러서 게으르게 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글쓰기가 걸려든 것뿐이다. 글쓰기는 아무 때나 생각나면 덤벼들어 쓰면 되는 것이다.
생각 안 나면 안 쓰고 급한 일이 있으면 뒤로 밀었다가도 쓸 수 있고,
때로는 미운 친구는 두고두고 곱씹을 수도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을 읽어본 친구들은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친구는 늘그막에 좋은 취미 가졌다고 부러워하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명예욕 때문에 늙어서도 놀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노예 생활을 하느냐고
비하하는 친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는 질투가 심해서 남이 잘 나가는 꼴은 보기 싫다며 카톡도 보내지
말라고 해서 연락이 끊긴 지 2년도 넘은 친구도 있다.
친구들과 만나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생길 수 있는 불편한 감정이 질투다.
질투는 ‘상대방이 누리는 것’을 ‘내가 누렸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자신이 질투하는 대상보다 더 잘됐어야 한다는 우월감과 상대방 보다 잘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의 열등감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그 교만에 못 미치는 현실에 대한
열등감 사이에서 줄타기 한다.
이 줄타기를 계속하는 한 우리는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물주는 현명하셔서 사람이 늙으면 줄타기에서 내려오게도 되고 자연스럽게 질투도
사라지게 만드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질투심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존감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부족함이 오히려 자신의 강점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내 생애 단 한번’의 저자 장영희 교수가 그 사례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동등한 너와 나를
인정할 때 비로써 질투에서 해방된다.
늦가을이 여름처럼 따스하더니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